풍요의 두 얼굴
풍요롭다는 것은 행복하다. 대대로 가난해 풍요를 누려보지 못한 부모 세대들은 1970년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나라 전체가 일심동체가 돼 근면성실하게 앞만 보고 달렸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압축성장의 성공은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며 또 다른 개발도상국가에서 수입해 가는 성장 모델이 되고 있다.
풍요롭다는 것은 진화한다. 잘 먹고 잘 사는 풍요를 넘어 삶의 질 향상, 문화생활 향유, 웰빙 추구 등 세대를 거치면서 풍요의 대상 또한 변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10년 이상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류는 최근까지도 잘 나가는 풍요의 진화물이다.
그러나 풍요롭다는 것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주말 휴일 인적이 드문 오름 가는 길이나 올레길에서 버려진 양심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멀쩡해 보이는 커다란 냉장고, 화면이 깨진 컬러TV, 골동품 수준의 가구, 심지어 폐건축자재까지 쓰레기 처리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버린 양심들은 수풀에 가려지거나 움푹 패인 곳에 방치돼 잘 보이지 않는다. 한때나마 소중했던 풍요의 대상은 우리들 몰지각한 양심으로, 소중한 자연을 오염시키고 있다.
전국 각지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눈에 보이는 산과 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강과 바다 속에서도 해마다 버려진 양심들이 쌓여가고 있다.
바다를 좋아하는 필자가 해안에 쌓인 다국적 쓰레기를 보면서 풍요의 문제는 이제 특정 국가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병이 태평양에 새로운 섬을 만들었다는 뉴스는 지구촌이 쓰레기 투기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문명의 발전은 우리에게 풍요를 선물했지만 풍요의 이로움과 편리함은 일정 부분 자연을 오염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풍요의 부산물이 자연을 파괴해 그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때까지 마냥 방치돼선 안 된다.
우리들 스스로 풍요의 잔해들을 잘 버리고 있는지 자연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주위를 돌아보고 대책을 수립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