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시공간, 뭍의 시공간

2015-12-06     송경호

제주에 몰려드는 ‘뭍사람’들
대부분 말길 끊어진 공간적 이웃
커진 말소리에 깊어진 섬의 침묵

종종 들리는 제주정착의 어려움
터 잡은 이 아닌 ‘새 이웃’의 몫
그리고 제주 가시거든 제발 ‘천천히’

뭍을 떠나 ‘섬나라’ 제주로 향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제주에 계신 장모의 시름도 덩달아 깊어간다. 몇 년 새 물 밀듯 밀려드는 ‘뭍사람’들 때문이다.

한적했던 동네도 소란스러워졌다. 도로는 자동차들로 붐비고 마을 곳곳이 무너지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 사라진 자리에는 낯선 건물이 들어선다. 예외 없이 높고 커 숨이 턱 막힌다. 도심을 벗어나면 수많은 렌터카들이 경주하듯 달린다. 형형색색 옷을 갖춰 입은 이들로 섬은 북새통이다.

마을에 들어온 낯선 이들도 부쩍 늘었다. 하나, 그들을 마주 하는 일은 쉽잖다. 매끄럽고 빠른 ‘뭍사람’들의 언어에 장모는 잔뜩 주눅 든다. 투박하고 굽은 ‘할망’의 말은 매끈한 그들의 언어와 어울리지 못한다. 말길이 이어지지 않으니 이웃은 그저 공간적 이웃일 뿐이다. 그런 이웃들의 말과 웃음소리가 높아질수록 섬 할망의 침묵은 더 깊어진다.

그렇다고 섬을 찾은 육지 사람들 탓할 일은 아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는 지친 심신 달래거나 삶의 양식을 바꿔보려는 이들일 것이다. 그래도 집단으로서의 그들이 주는 자극은 팔순 제주 할망에게는 꽤나 버겁다.

그들에게 제주는 쉼터거나 더러 놀이터이겠다. 하지만, 평생 섬 밖 나들이라곤 열 손가락 안 쪽인 장모에게는 대를 이어온 삶의 터다. 바다에 갇힌 그 삶터에 잇대 대를 이어 살아온 이들이 느끼는 정서는 ‘뭍사람’들의 것과 달라도 크게 다르다. 섬에서의 시간은 뭍의 시간과 같지 않다. 공간 또한 육지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평생 섬에 갇혀 산 장모의 몸속에는 그런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옹이처럼 박혀 있다.

장모에게서 제주 섬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나라거나 세계라는 느낌을 받는다. 나서 자란 제주 옛 도심에서 바라보는 서귀포는 ‘서울사람’이 떠올리는 부산만큼이나 까마득히 먼 곳이다. 그러니 ‘그 먼 곳’ 서귀포로 시집가는 막내딸이 몹시 안타깝고 눈물겨웠을 것이다. 할망에게 옆 마을 김녕조차도 1년에 한 차례 나들이가 쉽지 않은 동네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바닷사람들과 산사람들이 다르고, 서쪽 사람들과 동쪽 사람들도 구별한다.

거칠게 보면 서귀포를 부산, 대정을 광주, 성산이나 표선쯤을 대구 정도로 떠올리는 거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제주 할망의 머릿속에서 제주는 그 자체로 한반도의 축소판인 셈이다. 어디 장모뿐일까. 이런 시간과 공간 감각은 거의 모든 제주 토박이들 모두의 것 아닐까. 제주라는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거의 이렇지 않을까.

몇 해 전 구좌 쪽에 둥지를 튼 선배 역시 비슷한 경험을 들려준다. 가전제품이 고장 나 수리 요청을 했더니, 한 달에 한 번 ‘그 쪽’으로 ‘출장’ 가니 그 때 해 주겠다 하더란다. 뭍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여긴 제주니까” 그리 하라 했다며 껄껄 웃었다. ‘뭍사람’에서 ‘섬사람’으로 빠르게 변신한 선배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덕분에 선배의 주변에는 늘 ‘오리지널 섬사람’들이 있다.

뭍을 떠나 제주에 정착한 벗들은 종종 관계의 어려움을 말한다. 대정에 터 잡은 벗도 5년 살았지만 섞이지 못했다 토로했다. 말 뒤에는 대부분 ‘섬사람들의 특유의 기질’ 또는 ‘배타적 정서’를 들먹였다. 그럴 수 있겠다만, 그걸 넘어서는 건 결국 벗의 몫일 뿐, 터 잡고 살던 이 탓은 아닐 것이다. 섬이 좋아 섬을 찾았다면 스스로 섬의 정서에 맞춰야 하니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제주로 모여들어, 총알처럼 빠르게 오가는 모습은 어느덧 일상이 됐다.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풍경이라 할 수 없으며, 여전히 당혹스럽고 난폭해 보인다. 제주 할망과 육지사람 사이의 속도와 공간 감각 차이는 그리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부디 바라건대, 혹여 제주에 가시걸랑 천천히 ‘놀멍 쉬멍’ 다니시는 게 좋겠다. 차도 살살, 천천히 몰고, 되도록 걷거나 자전거를 타시는 게 좋겠다. 시간 없어 바쁘걸랑 아예 가지 마시라. 그리 바삐 다니느니 차라리 안 가시는 게 도와주는 거니 말이다. 그 멀다는 뭍과 섬의 정서적 거리는 이처럼 서로를 존중할 때 비로소 좁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