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량사업비 미련 못버린 도의원들 

2015-10-29     한경훈

행감서 난데없이 거론해 
‘지역 발전에 도움 된다’ 주장 
폐지된 제도 부활 불지펴

 요구 현실화되면  
예산전쟁 재연 도민피해 불보듯
지방정치 후퇴 선택 말아야

 

“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5년에 했던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다.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을 꼬집은 것이다. 당시 정치권, 특히 청와대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이 회장이 큰 곤욕을 치렀다. 서슬 퍼런 권력의 진노(瞋怒)에 놀란 삼성 측이 결국 사과했다. 하지만 이 폭탄 발언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 정서를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4류 정치’는 개선됐을까. 회의적이다. 국회와 정당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바닥이다. 최근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 국회·정당의 신뢰도는 3.1%로 사회기관 중 가장 낮았다. 중앙 정치권이 여전히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정치는 어떨까.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 제주도의회 의원들은 퇴행적인 면까지 보이고 있다. 2012년 폐지된 의원 재량사업비(지역현안사업비)에 대한 집착이 그것이다. 지난 21일 시작된 제주시 행정사무감사에서 도의회 일부 위원회 의원들이 난데없이 재량사업비를 거론했다. 김병립 제주시장을 상대로 한 정책질의 때다. 모 의원은 “재량사업비가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도의원 출신인 시장의 의견은 어떤가”하고 물었다. 예민한 사안이라 시장이 공개 석상에서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의원들도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과부 심정 과부가 알아 달라”는 듯 보였다. 꺼진 불씨를 어떻게든 되살려보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재량사업비에 대한 미련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행정사무감사에서 재량사업비 얘기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의회 내부에서 재량사업비를 관철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내년 제주도 예산안을 다룰 오는 정례회에서 본심이 표출될 전망이다.

재량사업비는 의원들에겐 달콤한 사탕이다. 제주도의 경우 종전까지 의원 1인당 3억3000만원 규모로 편성했었다. 사업비는 사용처나 사용기준 등 예산편성의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말 그대로 의원 ‘맘대로’ 집행했다. 자기 지갑 돈처럼 꺼내 선거구민의 환심을 사기에 적당한 사업 용도로 쓸 수 있었다. 집행과정에서 업자와 유착으로 이득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 등으로 인해 제도가 폐지된 것이다.

따라서 재량사업비 부활을 꾀하는 것은 역주행이다. 시대착오적이다. 지난해 말 구성지 도의회 의장의 ‘20억원(의원 1인당 재량사업비 10억원+공약사업비 10억원) 요구설’이 불거져 여론의 역풍이 맞은 것도 그 때문이다.

도의원들은 재량사업비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로 ‘선출직’을 들고 있다. 선출직인 도지사가 공약 이행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는 것과 같이 도의원에게도 공약 사업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할의 다름을 망각한 공허한 논리다.

도지사는 사업 계획과 그에 따른 예산을 짜고, 도의원들은 그것을 심사하는 위치에 있다. 도의원들이 재량사업비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회사 감사가 이사 역할까지 하겠다는 격이다. 자신들의 예산은 심사·검증의 사각지대에 두고, 도정의 살림살이를 감시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주도는 재량사업비 요구에 대해 “의원들의 공약을 비롯해 합리적이고 타당한 사업에 대해선 예산을 편성하겠다”는 입장이다. 의원들은 이에 따라 제대로 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예산을 따면 된다. 재량사업비 문제가 도정-의정 간 갈등의 씨앗이 돼서는 안 된다.

도의원들이 ‘제밥그릇 챙기기’에 연연하면 지난해와 같은 예산 파동이 재연될 수 있다. 집행부의 ‘단체장 동의 없는 예산 증액 및 신설 불가’에 도의회가 대규모 예산 삭감으로 맞대응하는 볼썽사나운 싸움은 이제 없어야 한다. 예산 전쟁의 피해자는 도민이다.

재량사업비 요구가 현실화할 경우 제주지역 정치는 ‘4류’ 이하로 떨어질 게 뻔하다. 도의원들이 지방정치를 후퇴시키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