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문화를 회복하자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주어진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시바이처)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이런 직접적인 의식이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이상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수많은 이론과 웅변은 회색이고 오직 생명의 황금 나무만이 푸른빛이다.
사랑은 그 푸른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생명은 전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것이다. 이 물결은 중심에서 주위로 전파되면서 원둘레의 모든 부분에 이르러 곧장 진동으로 바꾸어진다.
그것은 마치 봄 햇볕이 웅덩이에 고인 눈을 녹이듯이 일체의 비생명적 요소들을 소멸시키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최고의 재보는 오로지 생명이다. “벌레가 타이릅니다//목숨이란 아껴야 하네//세상에는 얼마나 복된 교훈이 많은지요”(유지환) 그러기에 성서는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삶을 누리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고귀한 생명력에 역행하는 죽음의 문화가 짙게 베어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화석 에너지를 비롯하여 온갖 공해물질들은 자연환경을 죽음의 재로 덮어놓으면서 시시각각으로 생명나무를 노리고 있다.
오염된 물, 유해요소가 들어있는 가공식품, 각종 무기물로 무장된 생산품 등 죽음의 재는 이미 우리의 식탁에도 침범하였다.
우리는 이 재를 걷어내기 위하여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일까?
오염된 환경보다 더욱 강한 위력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의식과 생활 태도이다.
극단적인 물신주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생명 경시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생명을 말살하는 내용들이 너무 쉽게 튀어나온다. 내가 있을 뿐이지,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은 불필요하거나 장애물,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내가 편리하게 살고 쾌락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거나 이용 가치가 없는 것은 모두 적대적인 대상이다.
이러한 비생명적 의식과 태도는 집단 이기주의와 결부되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마치 활화산 위를 맴도는 연기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을 지닌 채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런 활화산은 오로지 자신과 자기 집단의 찰나적인 이익만 위하여 폭발하는 것이므로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최근 일어난 군부대의 총기 난사 사건은 흡사 인간생명을 삼키는 괴물처럼 우리에게 경악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 전율할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나 진상에 대하여는 당국의 철저한 수사에 의하여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사 결과에 안주하기에는 우리의 가슴이 너무나도 쓰라림을 어찌할 것인가? 겉으로 들어나는 원인이나 동기는 지극히 피상적이거나 현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밑바닥에 깔려있는 원인은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깊이 침투한 생명경시와 죽음의 문화라는 악의 세력이다.
이 세력에 동조하거나 굴복하고 있는 우리를 고발할 사람이 없더라도 우리는 그 과오를 아파해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의 문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문화를 회복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모든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옛 성현의 가르침은 세월이 흐를수록 새로워지는 진리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 생명에 이것을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아야 한다.”(법구경)
김 영 환<전 오현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