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체자’ 문명 퇴치·14억 인구 언어의 통일 달성 기여

길호동의 차이나스토리<16>중국의 문자

2015-09-22     제주매일

중국 생활 초년병 시절이던 1990년대 중반 동창생과 함께 우시(無錫)에서 상하이까지 기차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2~3시간 지나고 내릴 때가 되었는데 앞에 앉아 계속해서 호기심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나이 지긋한 농촌 차림의 중년 남자 한 사람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건네다. “무슨 민족(民族)인가요?” 외국인을 그리 많이 만나 보지 못해서 그랬든지 아니면 우리 둘의 외모가 어느 지역 소수민족처럼 보였는지 2가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중국의 표준어와 어떤 방언들은 중국어와 한국어 차이처럼 차이가 크다. 그런데 오히려 한자를 같이 쓰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어 표준어의 어떤 발음들은 그리 천양지차가 아닌 것도 꽤 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중국어 발음이 “따한민구어”이니 4글자 중 2글자는 발음이 같고 두 글자는 비슷하다. 그러니까 중국은 지방에 따라 발음 차이가 한국어와 중국 표준어와의 차이보다도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초창기 교류에서 공통의 언어가 없었다는 것은 늘 장애였다. 중국과의 초창기 교류에 있어서 영어와 같은 외국어 자산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이 많지 않아 대개는 그들의 언어를 중심으로 업무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나 한국어로 소통이 안되는 상황이 많았던 지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 통역을 거쳐 일이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양국의 교류가 비약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교류시키는 여러 형태의 언어 도우미들의 역할이 컸다.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90년대 들어서면서 다양한 중국어 학습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중 관계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먼저 한국에서 중국어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일찍부터 중국 업무를 준비했던 사람들이나 대만에서 유학한 사람들, 한국 화교들 모두 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기업 프로그램에 의해 배출된 중국 지역전문가들도 역할을 했다. 중국 방면에서는 북한의 김일성 종합대학이나 김책 공업대학과 같이 북한에 유학하여 조선어를 전공한 중국인들도 필요한 곳에서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가장 많은 수로 활약한 언어 도우미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이었다.

그러나 해당된 누구도 언어 소통을 도우면서 겪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바로 방언들과 제대로 소통하기 어려운 수준의 표준어로 인한 장애였다. 넓은 대륙에 사투리는 얼마나 많겠는가? 실제로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중국 출장 중에 느꼈던 언어 장애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표준어 보급이 많이 진행되어 먹통의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조금 작은 규모의 도시에라도 가게 되면 표준어가 쉽게 통하질 않았고 나이가 조금만 지긋해도 의사소통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니 개국 당시 신중국의 시작을 선언하는 호남성 출신의 모주석 발음을 지금 젊은 세대들은 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신중국이 설립되고 수 십 년 노력을 기울인 것이 문맹 퇴치와 표준어 보급이었다. 이를 위한 간체자(簡体字) 사용을 골자로 하는 문자 개혁은 중국인들의 문맹률을 많이 낮추는 역할도 했지만 한자를 공유하는 여러 나라들이 중국의 인위적인 전통 문화 변형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도 한다.

중국 정부는 1956년 모두 2238개의 간체자를 발표했다. 가장 사용 빈도가 높은 상용한자들이 자획을 ‘과감히’ 생략하여 그야말로 간편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래의 ‘복잡한’ 한자는 번체자(繁體字)라고 한다.

간체자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 중국이 가진 오늘날의 다른 힘 하나가 바로 14억 인구의 언어 통일이 기본적으로 완성됐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에는 교육 기회가 늘어나는 환경의 변화 요인도 있고 산업화 과정에 따라 빈번해진 공간 이동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정책적인 노력도 있었겠지만 1990년대 이후 확대된 미디어의 보급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발휘했다 할 수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방언 사용을 제한하고 자막 처리를 하여 발음과 문자의 표준어 사용을 돕는다든지 하는 조치들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과거에 중앙집권을 통한 지방 관리 등용에 있어 필요한 표준어를 ‘관화(官話)’라 하여 오랜 세월 과거시험 과목으로 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을 현대의 미디어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며 해결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언어가 변화한 경우는 동북3성(吉林省·遼寧省·黑龍江省)에 많이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수교되고도 한 동안은 조선족 동포들이 쓰는 중국어식 단어나 북한 식 발음 등으로 인해 언어 소통에 가끔씩 장애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많은 동포들이 한국과 자주 왕래하거나 장기 거주하면서 오래된 억양이 자연스럽게 변화한 경우는 많다. 특히 중국에 거주하는 젊은 세대들은 위성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하게 되는 한국어에 자발적으로 동화되어 지금 구사하는 발음은 대충 들어서는 한국인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한국 개그 소재로서는 완전히 부적절한 환경이 되는 것이다. 몇해 전까지 개그콘서트에서 “우리 연변에서는 말입니다”하며 인기를 끌었던 한 개그코너의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족들의 억양과 발음도 좋하진 것도 있지만 워낙 그들과의 접촉이 많아지다보니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어색하지 않듯 그들의 말도 어색하거나 웃기게 들리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게 지구촌이라는 글로벌화의 영향이 아닐 수 없다.

 

中國 문맹 퇴치의 주역 ‘간체자’의 불편한 진실

글자 간소화 과정서 핵심 생략 표의문자 정통성 파괴

대만 “마음(心)이 없어진 애(爱)는 진정한 사랑(愛) 아니”

오래 전 중국에 갈 수 없었던 한 때 한국인들이 많이 찾던 외국은 대만이나 홍콩·일본 등지였는데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여행객과 현지 사람들이 나누는 필담(筆談)은 훌륭한 여행가이드 역할을 했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장점이 돋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한자(漢子)에는 큰 변화가 있어 필담을 통한 소통은 수월치 않을 때가 많다. 간체자의 쓰고 외우기 편안함은 중국이 문맹을 떨쳐내는데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정통 문화 파괴라고 주장하며 대만이 열거하는 예를 들어 보면 표의문자인 한자가 갖는 그 고유한 기능에 비춰볼 때 아쉬운 점도 있기는 하다. 마음(心)이 없어진 애(爱)는 진정한 사랑(愛)이 아닐 것이고 먹는 면(麵)도 보리(麥)가 없어진 면(面)은 먹을 곡물이 빠진 것이라는 등의 여러 예를 들어 한자가 간소화되면서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이야기하며 한자의 정통 계승자임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간체화된 2000여 자가 다 그렇게 핵심을 생략한 것은 아니겠지만 보기만 해도 그 한 글자가 함축한 의미만으로도 감동이 되기도 하는 한자의 맛과 생명력이 없어진 것과도 같아 아쉬운 감도 있고 중국의 도약으로 간체자까지 별도로 익혀야 하는 번거로움도 생겼다.

한 유명한 중국 현대 작가의 자서적 경험이 재미있다. 모주석 어록과 노신의 작품 외에는 모든 것들은 태워져야 마땅한 문화대혁명 시절 친구가 가지고 있는 귀하고 귀한 외국 문학의 필사본을 빌려 다시 필사하는 장면에서는 읽는 사람이 더 애가 탄다. 그 복잡하고 쓰기 어려워 시간까지 많이 걸리는 중국 문자로 책 한 권을 베껴낸다는 게 보통 작업이겠는가? 그런데 시대 배경을 보면 간체자 사용이 이미 시작됐을 때이니 시간이 절약됐다면 진짜로 간체자의 효용이 그대로 나타난 예라 하겠다. 한반도와의 공통 문화인 문자마저 변한 것처럼 신중국은 오래 전 전통으로부터 속속들이 달라져 있는 나라다. 나라가 크고 민족도 많은 만큼 문자와 언어의 통일도 늘 큰 숙제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