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시작되어야 할 평화의 섬
원자폭탄에 폐허된 ‘히로시마’
반드시 기억해야할 역사의 현장
학생들이 만든 ‘종이학 탑’ 감동
평화의 섬 제주 10년 ‘성과 별로’
제주포럼 유명 인사들만의 행사
주민 참여·감동 없는 평화는 공허
원자폭탄에 의해 폐허가 된 도시, 히로시마. 20세기를 통해 이 보다 영욕을 같이 한 말이 또 있을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야말로 인류사에 오점을 남긴 반문명적 사건이다.
물론 범아시아주의(汎亞細亞主義) 기치 아래 약소민족을 유린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행보까지 두둔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20세기를 관통해 온 국제사회의 패권쟁탈과 핵전쟁의 위험을 멈추게 할 새로운 세기를 위해서라도 히로시마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히로시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히로시마는 원폭이 휩쓴 도시와는 너무나 달랐다.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시골의 크고 작은 집들과 잘 가꾸어진 화단들이 한가로운 삶의 여백의 크기를 보여주는 듯 했다. 생각해 보면 마음의 깊은 상처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아물어 가는 것이 세상 이치인 듯 했다.
오타강 하구 삼각주 위에 펼쳐지는 평화기념공원, 원폭 돔은 한 순간에 파괴당한 유적이 겪어야 하는 숙명이라고나 할까, 반세기 전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운명의 날이 당사자들에게 어떤 아픔으로 응어리져 있는지 잘 모르지만 공원 한쪽에 자리잡은 ‘한국인피폭자위령탑’은 결국 인종과 국경을 넘어 우리 모두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일본인 교수로부터 평화기념공원 안 ‘종이학 탑’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이 탑의 주인공은 2살 때 피폭으로 인해 결국 10년 후 백혈병을 앓은 사사키 사다코였다. 1000마리 종이학을 만들면 완치된다는 말을 들고 병석에 누워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또래의 학생들이 사다코의 쾌유를 빌면서 너도 나도 종이 접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사다코는 끝내 종이학들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상심이 컸던 아이들의 마음은 히로시마를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3000여 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종이학 탑을 세웠다. 지금도 종이학 탑 옆에는 우리 어린이들까지 보내온 종이학이 전시되고 있다. 결국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거닐면서 내내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평화란 주민의 감동과 참여 없이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문득 ‘평화의 섬 제주’를 떠올려 본다. 2005년 대통령이 제주 세계평화의 섬 지정 선언문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제주도는 평화의 섬으로 탄생했다. 당시 도내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제주도가 국가 차원에서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세계 최초의 지역이 돼 앞으로 한반도와 동북아를 넘어 세계 평화의 거점으로 육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10여년이 지나는 지금은 어떠한가? 물론 제주도에서도 해마다 유명 정치가들과 학자들이 모여 평화의 섬에 대한 논의와 주장들을 쏟아내고는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의실에서 평화의 섬 제주에 대해 이야기 해보라면 학생들은 대부분 묵묵부답이다. 결국 거칠게 표현하자면 10차례 가까운 제주포럼은 요란하게 치러진 유명 인사들의 행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는가.
4·3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의 섬은 새로운 세기를 고민하는 우리의 과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땅의 주민들 가슴에 평화의 불꽃을 심지 못하고 있다.
자유와 평화란 단순한 수사적 용어가 아니라 실제적인 차원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정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 중에서 주민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평화의 절절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정신적 소모이며, 지적인 유희이다.
따지고 보면 주민이 없는 평화의 섬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의 섬은 고작 몇몇 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아카데믹한 성찰의 장은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섬을 위한 학술적 평가나 정치가들을 모아 놓은 세미나는 그 다음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