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꽃의 역사가 있다

2015-08-25     강성분

제주사람들도 정원꾸미기 즐겨
항상 꽃을 보는 자연환경 영향
귀농의 꿈은 아름다운 정원

바쁜 삶 잡초의 꽃도 볼 틈 없어
이제는 부지런 떨어야지
애들 자란 집과 함께 꽃 추억하게


원예를 좀 아는 사람은 원예하면 일본을 떠올릴 거다. 우리나라는 꾸며진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풍경을 더 좋아했으니 당연하다. 내가 제주도에 살면서 느낀 바는 제주도에 사는 이들이 정원꾸미기를 꽤 즐긴다는 것이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뜨락에 꽃을 들이지 않은 집이 거의 없는 듯 보인다. 언제나 꽃을 볼 수 있는 자연환경도 이유가 되려니와 어딜 가도 꽃이 만발해 있으니 꽃이 없는 집안은 외려 삭막한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꽃을 꾸미고 나무를 즐긴 호사가들이 꽤나 많았다 한다. 그 중 유박이란 인물은 단연 그 ‘화벽’이 대단한 화원 경영자였다. 그는 황해도 배천군 금곡에서 오로지 꽃을 가꾸며 살았는데 그의 이전 행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유득공이 그에 관해 지은 글을 보면 한창나이에 벼슬을 포기하고 바닷가에 정착한 은둔자라고 한다. 그는 백화암이라는 꽃 박물관을 지었고 ‘화암수록’이라는 화훼 전문서를 지었다. 꽃들의 품평회를 열기도 하고 꽃의 품의를 나누기도 했다. 그의 화원은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았는데 온갖 종류의 꽃을 심어서 이기도 하려니와 외국 선박에서 외국종 꽃을 구해오기도 했단다. 실로 대단한 전문성과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기 집의 현판에 그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졸렬하여 스스로 판단해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사는 곳의 산수는 무겁고 탁하여 유람할만한 경치가 드물다. 거적으로 문을 단 궁벽한 집이라, 한 해가 다 가도록 훌륭한 분의 수레가 찾아오질 않는다. 이러한 즐거움을 남들에게 양보하고자 하여도 사람들은 이것을 버린다. 그러니 나 홀로 즐겨도 다행히 금하는 이가 없다. 기쁠 때도, 화날 때도, 시름겨울 때도, 즐거울 때도, 앉아있을 때도, 누워있을 때도 언제나 화병의 꽃에 의지하면서 내 몸뚱어리를 잊은 채 늙음이 곧 이를 것도 알지 못한다.” 

이외에 ‘국화품종을 개량한 김노인’이라 불리운 사람도 있는데 강이천이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옛날 여항에 김노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국화를 잘 심어서 꽃을 일찍 피게도 늦게 피게도 했다. 그의 꽃밭엔 몇 치 크기로 키워 손톱처럼 작은 꽃이 빛깔은 곱고 자태는 간드러진 것도 있고, 한길 넘는 크기로 키워 꽃이 몹시 큰 것도 있다. 게다가 꽃의 색깔이 옻칠을 한 듯 검기도 하고, 또 가지 하나에 여러 빛깔의 꽃이 섞여 피기도 했다. 귀공자들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 다투어 꽃을 사가 노인은 그 값으로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그 방법을 비밀에 부쳐 그 뒤로 비방을 전하는 자가 없다.“ 진정 과학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김노인을 욕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시대에는 양반이 벼슬하는 것 외에는 가치를 존중받는 직업이 흔치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미국에 타샤 튜더(Tasha Tudor·1915년~2008)라는 동화작가이자 삽화가가 있었다. 그녀의 정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그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아마 유박의 화원이 그와 같았을까 싶다.

생전의 그녀는 나이가 90이 넘어서도 꼿꼿한 허리와 그 정신의 또렷함을 보여 주었는데 아무래도 꽃밭에서 노동을 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늙는 것을 잊은 듯하다. 본디 우리네 고달픈 농민들이 빨리 늙는 것과 대비되는 것을 보면 역시 어떤 마음으로 노동하느냐에 따라 저렇게 다른 인생을 만드는구나 싶다.

은퇴하고 귀농한 농민의 마음과 소 팔아서 자식 대학등록금 내야 하는 농민의 노동이 어찌 같으랴. 아름다운 정원을 꿈꾸며 귀농했건만 필자 역시 한참을 더 거둬 먹여야 할 자식이 둘이다보니 정원은커녕 잡초에 피는 꽃을 들여다볼 틈도 없다.

자연스러움을 빙자해 방치하다보면 어느새 괴물처럼 자란 풀들이 정글을 이룬다. 이제는 부지런을 좀 떨어야겠다고 다시 다짐해본다. 꽃의 역사를 이룰 정도는 아니라도 내 아이들이 자신들이 자란 집을 추억할 때 앞마당의 꽃나무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