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한 평생 실천하는 신념 같은 것”

<광복 70주년> 성명을 지킨 사람
故 이달빈 선생 장남 이문웅씨 인터뷰

2015-08-13     문정임·김동은 기자

“아버지는 끝까지 이름 석자를 고수했어. 그래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 제목을 ‘성명을 지킨 사람’으로 지은 거야.”

제주 출신 故 이달빈 선생(1893~1979)의 장남 이문웅(75)씨는 부친의 일대기를 다룬 책 제목을 정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까지. 이름을 지키며 사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일과 같던 시절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길에 나선 신(新) 지식인으로서 안락한 삶이 가능했지만 이 나라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고 싶었다.

이달빈 선생은 일본 유학 당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제주인 3명 중 한 명이다. 2·8독립선언은 얼마 후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 ‘만세’ 외침을 퍼뜨리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광복 70주년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이달빈 선생의 장남 이씨를 만났다. 이씨에 따르면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인 故 이달빈 선생은 한국인 최초의 수의사로 창경원(현 서울동물원) 동물원장을 지냈다.

1909년 제주인 최초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1919년 2월 8일 오사카에서 조선유학생회가 주최한 조선독립선언서 낭독에 참여, 조국의 독립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이 일로 부친은 악명 높은 이카이노 경찰서에 구금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생전 나라를 위한 여러 활동을 했지만 고희를 넘긴 아들이 황혼의 즈음에서 부친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가슴이 저미는 것은 이름 석자를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집 안에 소나무 가지만 있어도 순사들이 잡아가던 시절이죠. 창씨개명을 안 한 사람은 모든 배급에서 제외되고, 도항선 표도 안 끊어줬어요.”

이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정직과 성실을 강조했다. 부드럽지만 뚝심 있는 ‘외유내강형’ 성격이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씨는 3·1운동에 비해 2·8독립선언이 부각되지 않는 점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선친이 여전히 국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서운함을 토로했다. 무엇보다 광복 70년을 맞는 지금도 친일 인사에 대한 정리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특히 걱정했다.

“어느 한 사건만을 기준으로 거기에 참여하면 항일, 친일. 이렇게 단편적인 기준은 좋지 않아. 이후 변절하는 삶을 살기도 하잖아. 나라를 지켰다, 버렸다는 말은 적어도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며 이야기 해야 맞지 않겠어요?”

지식인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던졌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한 이가 우리나가 굴지의 기업을 이끌고 있고, 위정자라고 국회에 앉아있는 사람들 태반이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았는데 지식인들이 나라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아쉬워. 이 사회를 견인할 참 지식인이 많지 않아 보이는 것도 속상하고.”

이씨는 인터뷰 내내 손에서 조그만 책자를 놓지 못 했다. 몇 해 전 그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한 책이었다. “생전에 효도도 못 했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너무 묻어두면 안 되겠다 싶어 냈어. 아버지가 기록을 하나도 안 남겼거든. 세상은 공수레 공수거라고···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일생을 통해 실천하는 어떤 꿋꿋한 신념 같은 거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