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크는 나무는 없다”

2015-08-12     정민자

‘감동’ 사소해도 진심 담기면 가능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
정말 괜찮은 말 ‘밀당’ 잘하기


외면 받는 제주연극의 현실
비판 좋지만 관심과 애정도
옆에서 기다려주는 배려·사랑

사람들은 언제 감동할까.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위로의 말을 들었을 때, 같은 선물을 받더라도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골랐다는 말을 함께 들었을 때, 엽서 하나라도 직접 손으로 그림 그리고 고민하면서 글을 쓴 흔적의 엽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더 큰 감동을 느낀다. 그 감동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그 감동을 준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이어진다. 

몇 년 전 시집을 낸 친구의 출판기념회를 온 마음으로 빛내주고 싶었다. 고민 끝에 출판기념회에서 시극 퍼포먼스를 공연해 주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 친구는 큰 감동을 받았다며 고마워했다. 이런 예는 많다. 아주 사소하지만 그 속에서 진심이 담기면 가능한 일이다.

연애를 조언하는 말 중에 가장 괜찮다고 느껴지는 게 “밀고 당기기를(밀당) 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방적으로 끌기만 해서는 다가오기는커녕 멀리할 수도 있으니 적당하게 밀었다 당겼다 해야 연애에 성공한다는 얘기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것은 고립이고 두려움을 갖게 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멧돼지를 잡으려면 멧돼지처럼 생각하라고 한다. 멧돼지를 잘 잡는 사람은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아니라 멧돼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멧돼지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새끼 낳는 곳은 어디인지, 위험에 닥쳤을 때 도망치는 길은 무엇인지 등등.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야 멧돼지를 잘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공연장에 관객이 없다고 이걸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 요즘 문득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감동을 관객에게 주려고 이런 작품을 만들었나?” “그만큼 고민하고 나서 덤벼들었나?” 자신 있게 그렇다는 확신이 없다. 그냥 하던 일이니 관성처럼 그냥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떤 이가 묻는다. “남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었는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많은 시도는 해봤는가, 공연 후 외면 받는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고 있는지…” 고개를 들 수 없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대꾸도 못하겠다.

그런데 한 편으론 그이에게 말하고도 싶다. “혼자 크는 나무는 없다”고. 몇 백년 된 나무들도 그 옆에 다른 나무나 큰 바위가 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쓰러지는 것을 막아 버티게 해줬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사람들도, 보수도 적은 ‘연극쟁이’들도 마찬가지라고.

이런 말을 하기가 민망하기는 하다. 그리고 좋아하고 칭찬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그림자도 못 보니 문제점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니 어떻게 고치면서 성장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항상 비판 받고 꾸지람이나 듣는 사람도 성장할 수 없다. ‘밀당’처럼 적당한 시점마다 당근이 필요하고, 채찍도 필요한 것이다. 잘 클 수 있도록 옆에서 버팀목도 돼주고 지켜주고 기다려주는 배려·인내·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 연극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다음 공연을 기다렸다”는 관심, “애썼다, 열심히 만들었다”라는 칭찬이 그립다. 물론 과감한 비판도 들을 준비가 돼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곳 제주에서 문화예술이 피어나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말들이 많아야 한다. 늘 해왔던 지적질의 말이 아닌 애정 어린 말들, 진정으로 아끼고 성장하길 바라는 말들, 봐주는 그런 마음을 담은 말들이 절실하다.

우린 그 마음을 얻고 싶다. 공연예술은 관객의 소중한 애정 없이 성장할 수가 없다. 열악한 공연예술의 현실만 탓하면서 변명만 늘어놓았던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반성도 해본다. 관객들이 몰려오지 않는다고 서운한 마음만 갖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겠다는 굳은 마
음으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