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사라진 ‘오래된 미래’
멕시코 ‘망자의 날’ 기념축제
가톨릭 90% 불구 토속무속 강렬
전통문화 풍요로움에 감동
제주엔 전통축제 없고 이벤트만
풍부한 제주신화·무속신앙 등
현실과 영상으로 만날 수 없을까
최근 제목도 특이한 ‘나의 사랑스런 개 같은 인생(감독 도리스 되리·2014년 작)이란 다큐멘터리를 봤다. 멕시코 여성 마리아치들의 음악과 삶에 대한 감동과 애환을 담은 영화다. 굉장히 낭만적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멕시코 문화에서 장례식이나 결혼·생일 파티 혹은 데이트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마리아치들은 기타나 바이올린·만돌린·관악기 등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그런 자리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멕시코는 이렇게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성폭력과 마약 등 그 어두운 부분엔 남성들의 거친 마초성과 공고한 가부장문화가 있다.
그러다보니 여성마리아치들이 극히 드물며 활동을 지속하기도 힘겹다. 비록 남성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부를지언정,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마리아치 그룹을 결성해 연주 해온 나이 지긋한 1세대 여성들은 이제 노쇠해 걷기도 힘든 신체에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해도 여전히 목소리는 활력 넘친다.
내 삶의 애환을 담은 음악을 연주하며 홀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1.5세대 여성마리아치. 남편의 이해와 지지를 겨우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돌봄과 가사 노동에 대한 부담으로 힘든 2세대 마리아치. 여성마리아치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그들의 삶에서 열정과 자부심이 느껴지며 마음이 짠해진다.
멕시코에서는 ‘망자의 날’을 기념하는 축제가 풍성하게 열리는데, 여기서 공연하는 이 여성마리아치들의 연주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멕시코에 살아 있는 전통문화의 풍요로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멕시코는 가톨릭교도가 국민의 90%를 차지한다지만, 가톨릭 의식에 멕시코의 토속적 무속이 자연스럽게 스며있기에 전통의 색채가 강렬하다. 음식·꽃·해골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인형과 그림들, 제주의 ‘기메’와 비슷한 종이를 오린 장식 등 시각적 인 풍성함과 마리아치들의 음악이 가득 울리는 광장! 남녀노소 없이 마을 전체가 그 축제 속에서 망자들이 살아날 듯 흥겹고도 슬프다.
이 다큐를 보는 동안, 여성마리아치들의 음악과 생존을 위한 치열함에 감동과 애처로움을 느끼면서도 뭔가 불편한 심정이 다른 한편에서 꼬물대기 시작했다. 왜 우리들 공동체의 전통 축제들은 현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기획된 이벤트 공연으로서만 어렵사리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다.
신들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는 그만큼 풍부한 신화에 다채롭고 신비로운 조형미를 띤 독특한 기메들이 있고 마을 곳곳에 ‘희노애락애오욕’ 칠정을 다루는 ‘당’이 있다. 이제 그 당을 지키는 매인 심방도 거의 없고 ‘당’조차도 마을에 남은 노인들에 의해 근근이 돌봐진다.
그 마저도 자고 일어나면 생기는 ‘신작로’로 사라져간다. 가속 페달을 밟은 근대화는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무속신앙을 미신이라며 공권력으로 때려 엎었다. 다큐멘터리 ‘만신’에서 보았던 그 폭력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할머니 손을 잡고 새벽미사에 나가고 삼종기도를 드렸던 내 어린 시절, 어린이 성경 그림책과 외국 신화를 옛날이야기처럼 읽었으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제주 땅의 신화는 존재조차 몰랐다. 그러니 20여년 전 처음으로 제주에 풍부한 신화와 ‘당’이 있음을 알았을 때 마치 내 정체성이 부정당하고 뿌리 없이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마리아치들의 애절한 연주와 화려한 시각적 체험으로 멕시코의 ‘망자들의 날’ 축제를 경험했다. 바로 며칠 전에는 사랑과 스펙터클함으로 버무려진 화려한 모습의 캐릭터들을 내세워 ‘망자들의 날’을 소재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애니메이션도 보게 되었다.
이 두 영화들은 9월에 개최되는 제16회 제주여성영화제에서 만나게 되겠지만, 우리들 삶을 관장해온 제주신화의 세계가 이렇게 현실과 영상에서 동시에 만나는 날이 우리에게도 올 수는 없을까. 애니메이션 ‘바다의 노래’에서 바다표범과 인간을 오가는 아일랜드 신화 속 ‘셀키’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 당하자 시들시들 죽어갔다. 신화는 ‘오래된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