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누구의 것인가
땅을 둘러싼 투전판 승자는
더 많은 판돈 가진 자들
땅 문제는 동서고금 모두 비슷
제주 땅 곳곳 투기로 수난
국적불명 놀이터 둔갑 신음
특별자치도 특별정책은 있나
땅에 관한 한 허다한 정책이나 담론이 무기력한 시대다. 땅에 관한 탐욕은 구를수록 덩치를 더 해 가는 눈덩이처럼 부푼다. 덩달아 세상에 자기 이름 석 자 박힌 땅 한 평 없는 이들의 머릿수 또한 늘어간다. 투기는 권좌에 오르고자 하는 이들의 교양필수 덕목이며, 좀 더 많은 땅을 위한 위장전입 역시 그들의 전공필수 과목이다.
땅을 둘러싼 사회 구성원 제 세력 간의 그야말로 피 튀기는 투전판에서 승자는 언제나 더 많은 판돈을 가진 자들이다. 빈약한 밑천의 농민들마저 미친 듯 불어대는 개발 광풍을 견디기 쉽지 않다.
이런 세상에 100년 전의 옛 책을 떠올린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헨리 조지(1839~1897)가 ‘진보와 빈곤’이란 책을 쓸 당시 미국 사회도 땅을 둘러싼 총체적 병리현상이 만연했다. 땅 문제에 관한한 100년 전 미국이나 오늘날의 우리사회나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돌아볼 필요는 있겠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그의 문제의식은 기술적 진보에 따른 사회적 생산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더욱 악화돼가는 원인을 찾는데서 출발한다.
오랜 연구 끝에 헨리조지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자연이 모든 인간을 위해 제공한 것(땅)을 일부가 배타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최고 정의의 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경제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사회법칙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대부분 성직자들은 ‘창조주의 섭리’라며 ‘어린양’들을 달랜다.
이러한 인식에 바탕 한 헨리 조지는 실상 경제학자라기보다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 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그는 땅과 물, 공기, 햇빛 등 모든 자연의 산물은 인구가 아무리 증가해도 궁극적 한계에 이르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도 빈곤과 기아 등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경쟁자로, 적으로, 먹이와 먹잇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아울러 인구 증가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사회적 부의 증대는 결국 지대(地代)의 절대 총액 증가로 이지어고, 이러한 땅의 가치(지대·land value)가 총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물질적 진보의 혜택이 노동과 자본에게 고르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분석했다.
결국 문제 해결의 핵심인 땅 문제를 풀기 위한 방안은 ‘토지사유제’를 없애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미 사유제가 관습화된 나라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도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헨리 조지는 그 대신 지대조세제(land value taxation)라는 카드를 내놓는다. 여기서 지대(land value tax)는 토지의 연간 임대가치를 일컫는데, 이 제도를 도입하면 다른 모든 조세는 거둘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본다. 지대조세제 도입만으로 생산을 촉진할 수 있으며, 분배 정의가 제고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헨리 조지는 땅 문제 해결에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불의를 물리쳐 없앨 때 보상을 받아야 할 자가 있다면, 그는 (사회적) 불의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지, 그로 인해 이익을 얻었던 자가 아니다.” 라고.
오래 전 수도권에 촉발된 투기 열풍이 전국 방방곡곡을 거쳐 마침내 제주 땅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문전옥답부터 수려한 바닷가와 중산간지대까지, 투기 자본이 눈독들인 땅들이 속속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자연경관이 잇따라 인공구조물로 대체되면서 제주는 제주다움을 잃고 국적불명 놀이터가 돼가고 있다. 땅을 기반으로 한 자연유산이야말로 제주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그렇다면 그 땅을 지키기 위한 ‘특별자치도의 특별한 정책’은 대체 무엇인지, 고민은 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