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놈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2015-06-03     김영환

잘못된 우리의 교육 문제
교사?학생 주입식 지식 전달 관계
인문학 아닌 체제순응 교육 양상

제주에선 새로운 교육 시도
실적 급급하면 무늬만 ‘혁신학교’
학원도 배움 공동체로 변모해야


아이들 공부는 알아서 하던 아내가 아이 학원문제로 심각하게 말을 걸어온다. 영어 학원을 보내려면 학교 관악부를 그만둬야 된다는 것이다. “꼭 다녀야 되느냐”는 질문에 아내의 답은 “중학교 가면 못 따라가요”였다. 방과 후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초등학생의 현실이 우리 막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에서 행복지수 최하위, 가장 불행한 삶으로 평가받는 우리 아이들. 우리의 교육현실이 모두 대학입시에 맞춰지고, 서열화된 학교와 학교성적이 우리 아이의 삶의 등급과 동일시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육은 사람간의 상호 의존성을 느끼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기보다 동료는 경쟁상대로, 교사와 학생은 주입식 교육체계 속의 지식전달 관계로 인식할 뿐이다.

세계 100대 석학이자 정치철학자인 미국의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를 통해 세계 각국에서 행해지는 지금의 교육이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미국의 교육학자 에버레트 라이머는 ‘학교는 죽었다’에서 “학교는 체제에 순응하는 법을 훈련시키며, 사회계층화 작업과 교육에 대한 빈부격차가 특권유지의 기반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생각하는 인문학’의 저자 이지성은 “우리나라 교육은 인문학 중심인 미국 지배계층의 사립학교 교육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공립학교 교육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의 교육이 인성교육, 민주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이라기보다 경제성장에 관련된 것들이라는 누스바움의 주장에 동의한다.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양반·상놈으로 신분을 구분했던 조선시대로 치면 인문학 중심의 양반들의 교육이 아니라 생산기술 향상과 체제순응 교육을 받았던 상놈에게 적용한 교육시스템에 가깝다.

이제는 ‘상놈의 공부’를 넘어 ‘양반의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수학을 잘해도 거스름돈 계산엔 관심이 없고, 잃어버린 학용품은 다시 사면되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아이와 이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이 우리 부모들이고,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을 보면서도 공교육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제주도는 이석문 교육감 체제가 들어선 이후 학생간 멘토-멘티, 거꾸로 수업, 하브루타 수업 등 다양한 교수학습법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특히 제주형 혁신학교인 ‘다혼디 배움학교’가 시범운영 되고 있다. 이들 교육방식의 공통점은 학생들의 학습흥미 유발과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점, 질문하고 토론하고 사고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교육으로 누스바움이 말하는 이른바 비판적 사색능력을 길러주는 교육,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진흥케 하는 교육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혁신학교의 성공에는 많은 난관이 있다. 학업성취도나 대학입시에서 기존의 경쟁교육 방식을 이겨내지 못하면 학부모들의 불안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다. 학습진도를 생각해 조급한 지식 전달과 모든 걸 가르쳐줘야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교사들의 자발성 결여로 실적에 얽매인다거나 보여주기에 급급해 무늬만 혁신학교로 운영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열린교육·자율학교·혁신학교 등 아무리 좋은 제도도 학부모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혁신학교의 성공을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육의 현실에 대한 앨빈 토플러의 지적처럼 미래에 필요치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잠 안자고 공부하는 것보다 비판적 사색능력을 갖추고 토론을 즐기는 아이가 경쟁력 있는 아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학원 또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배움의 공동체로 변모해야 한다. 사실상 제주에 학원들은 부모를 대신해 많은 부문에서 아이들의 배움과 돌봄 교실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생각한다. 입시제도에 발 빠르게 대응하듯 거꾸로 수업과 공동체 수업 등의 혁신학교에 걸 맞는 학원의 발 빠른 변화 또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