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선조 요청으로 말 500필 바쳐 ‘功臣’
길따라 이야기따라
⑬‘헌마공신’ 김만일과 관련된 ‘한신로’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은 경주 김씨 제주 입도조 김검룡의 7세손으로, 명종5년인 1550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태어났다. 김만일은 임진왜란으로 전마 부족에 시달리자 자신의 사둔마 500필을 조정에 헌납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귀감이 됐다. 도로명 주소로 ‘한신로’라 불리는 의귀리에는 ‘제주마의 본향’라는 표석이 있다. 김만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선 통틀어 가장 큰 목장 소유
김만일이 한라산을 거쳐 제주성으로 가고 있던 어느 날. 수말 한 마리가 울면서 김만일을 따라오기에, 그 말을 끌고 집으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은 하룻밤이 지나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몇 달이 지나자, 사라졌던 말이 암말 80여 마리를 데리고 다시 김만일의 앞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말들은 해마다 새끼를 낳았는데, 3~4년 사이에 1000마리가 넘으면서 가장 큰 목장을 갖고, 많은 말을 키우게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말을 다루는 능력도 아주 뛰어난 김만일은 대량으로 번식시키는데도 힘썼지만, 젊은 청년들을 모집해 기마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당시 각 마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인 수령들은 진상품을 걷는 다는 이유로 좋은 말들을 모두 징발했다고 했다.
김만일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일부로 말의 눈에 상처를 내고 가죽이나 귀를 찢어서 보기 좋지 않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김만일은 좋은 말들을 계속 생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전·후 마필 조달…집안대대로 산마감목관 지내
김만일이 43세가 되던 해인 1592년. 당시 조선은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조정은 말이 부족한 상황에 놓였다.
전쟁으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여서 전마를 보충할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전쟁의 피해를 그나마 덜 입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오는 것이다.
김만일은 선조의 요청으로 자신의 말 500필을 기꺼이 바쳤다.
당시 말 한필은 노비 2~3명에 달한다고 하니, 말 500필은 어마어마한 숫자다. 김만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광해군, 인조에게 1300필 이상의 말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은 김만일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어 종1품 숭정대부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부총리’급이라고 하는데, 제주출신으로는 가장 높은 벼슬을 받은 위인이다.
조정에서는 김만일 집안에 산마장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종6품인 감목관은 관영목장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제주에서는 최고 지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김만일 집안의 사람 80여명은 약 200여년간 산마감목관을 지냈다고 한다.
▲김만일 후손들 지금도 ‘대’ 이어받아
김만일의 직계 후손인 김동후씨는 제주마협회장을 맡으며 제주말 육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김만일은 제주로 유배온 간옹 이익(艮翁 李翼)과도 연관이 있다. 김만일의 딸이 이익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사돈’이 됐기 때문이다.
김만일의 묘역은 지난 2009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65호로 지정됐다.
의귀리 1773번지에 위치한 그의 분묘는 17세기 제주분묘의 산담과 봉분의 축조양식 및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된다.
김만일 가계의 소장 고문서들은 지난 1994년 후손들에 의해 제주교육박물관에 기탁된 것으로 전해졌다.
기탁된 물품들은 김만일의 아들인 김대길 초대 산마감목관 임명 교지를 포함해, 국가가 김만일 가계의 구성원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발급했던 과거급제 합격증서 등이다.
올해 ‘김만일 공 성역화 사업’도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제주도는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인규)와 함께 인물화·초상화 제작을 비롯해 다양한 워크숍 등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의귀리의 유래 450년전 마을 형성…기후 온화 감귤재배 최적지
의귀리의 옛 이름은 ‘옷귀’, ‘옥귀’, ‘옥기’등 다양하다. 하지만 김만일이 조정에 헌마(獻馬)한 뒤로 그의 후손이 조선 몇대 임금 영조로부터 어의(御衣) 한 벌을 받은 데서 ‘옷귀’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1000여년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의귀리는 약 450년전 쯤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의귀리는 기후가 온화한 만큼 감귤 재배의 최적이라고 불린다. 위미리는 제주4·3사건과 떼어놓을 수 없다. 의귀국민학교(현재 의귀초등학교)는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제2대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었다. 이들은 마을 주변의 숲 등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잡힌 주민들을 학교 건물에 수용했다고 한다. 1949년 1월 12일 무장대는 1대대 2중대를 기습했는데, 이 사건으로 사망한 무장대는 ‘송령이골’에 집단 매장됐다. 의귀리에는 ‘넉시오름’도 있다. 남원읍 태흥리 출신에 날개돋은 장수가 관군에 쫓기자 의귀리에 한 오름에 정상을 밟았는데, 오름의 넋이 나가버려 ‘넉시오름’ 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