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건물이 행복은 아니다”
예래동 해변가에 몰아친 개발
50층 조감도에 주민들 압도
거대자본에 대한 흥분과 불안
‘예래휴양단지 불법’ 대법원 판결
주민 “죽은 자식 돌아온 기분”
어떻게 정리해 갈지 모두가 주목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상상했던 도시의 풍경화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다. 가난한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하리라고 여겼다. TV는 연일 잘 사는 모습의 지표처럼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비췄다. 카메라가 그곳에 포커스를 맞추는 일이 잦아질수록 1970년대 어린 시절, 도시에서 길을 잃는 꿈을 간혹 꿨다. 도시를 동경하며 살게 만든 언론과 교육의 최종 목표는 조국의 근대화였다. 어찌된 일인지 저마다 꿈의 한쪽 모퉁이에는 거대한 건물이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잘 사는 것은 높은 건물이라고 정의 내린지 이미 오래였을지 모른다. 해변가에 들어선 서양의 높은 건물처럼 잘 산다는 게 이런 모습인가 싶었을 것이다.
8년 전 빌딩이 예래동 해변가에 조성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귀포시 예래휴양단지 추진 주체인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는 맨 먼저 50층 빌딩이 그려진 조감도를 언론에 공개하며 지역 주민을 놀라게 했다. 우리가 꿈꿔왔던 부의 왜곡된 형상이 신호탄 되어 마을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을주민도 거대자본이 이 작은 지역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야릇한 흥분과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주목받게 된다는 흥분과 불안, 이 두 심정은 곧이어 예래 해변가 공사장을 들락거리는 커다란 트럭의 흙 타이어 자국으로 변해버렸다. 끝없이 공사는 진행됐고, JDC와의 법정 소송 소식도 들렸다.
잘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모두가 고민해야하는 시절이다. 생태적 삶을 지향했던 제주에서의 삶이 헝클어지고 싸울 수 없는 상황만 있었을 것이다. 아는 삼촌과 함께 오면 그냥 물러서야 했다 증언한다. 우리는 좁은 제주 땅에서 눈앞에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간다. 인정하건 지속적으로 거부했건 모두가 힘들다. 어디 이런 상황이 예래마을 뿐이던가. 존경받는 참스승들도 사라지고 기댈 사람 없다. 모든 변화가 그저 불안한 휑한 눈, 야윈 우리의 늙은 부모는 힘이 없다.
유원지를 포함한 예래휴양단지 사업자체가 불법이라는 판결을 고법에 이어 대법원 가면서까지 받아냈다. “시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써야하는 유원지를 일부 관광객과 고소득 노년층만을 위해서만 쓸 수 없다”는 판결에 한 시민은 “죽은 자식이 돌아왔다”고 했다. 법원이 여태껏 불법으로 진행됐던 사실을 인정해준 것이다. 대법원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말한 시민이 이야기 속 ‘다시 살아온 자식’은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
쫓겨난 자식이 성공해 돌아온 제주신화의 ‘가믄장아기’가 떠오른다. 귀한 아이인 줄 모르고 셋째 딸 가믄장아기는 ‘불효’의 오해 속에 집안에서 내쳐진다. 그 후, 잘 살 것 같았던 가족은 피폐해진다. 어떻게 불행해 가는지 제주신화 무가는 절절히 입으로 전해왔다.
성공해 돌아온 가믄장아기가 떠올랐던 이유는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왔을 때 말로 표현 못하는 놀라움과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각으로 보는 주민들의 심정은 어떤 두려움일지 애써 모른 척 해본다.
개발이 잘 돼야 나도 좀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탓하고 싶지 않다. 거대자본은 모든 정보를 차단할 줄 안다. 우리는 그간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못했다. 그저 멀찌감치 거대 자본에 큰 것을 내어주고, 떨어지는 작은 우수리에 눈멀어지는 현실에 가슴만 치는 형국 아니었던가. 거대자본 그 욕망의 끝은 도대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말이다.
우선 몇 해 동안 가려있는 회색 펜스를 걷어내어 시민의 조망권을 확보하고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할 때다. 주민들의 유원지를 불법으로 팔아 챙긴 JDC, 제주도정은 어떤 대안으로 정리해 갈지 모두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조들이 소나무로 조림하며 해풍을 막았던 아름다운 예래해안 보리솔,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예래천 따라 물은 맑게 흐를 것이다. 해마다 휩쓸어 갔던 홍수도 자랐던 많은 수생식물의 무리처럼 서로 상처를 치유하며 자리 잡아가기를 석가탄일 이른 아침 진심을 담아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