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정신’ 의녀 김만덕 얼이 살아 숨쉬는 곳

길따라 이야기따라
⑪김만덕 정신 서려있는 ‘만덕·산지·임항로’

2015-04-27     박수진 기자

제주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김만덕(金萬德, 1739∼1812년). 제주특별자치도는 김만덕을 기리고자 ‘김만덕 기념관(산지로)’과 ‘김만덕 객주터(임항로)’를 완공, 다음 달 개방을 앞두고 있다. 본지가 열한 번째로 보도할 곳은 김만덕과 관련이 있는 도로명 주소로 만덕로와 산지로, 그리고 임항로로 불리는 ‘건입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 배고픈 민초 구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김만덕은 외삼촌 집에서 자랐으나, 이 마저도 여의치 않아 기생 월중선에 보내져 11살에 기녀가 됐다.

김만덕은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가난으로 기녀가 됐다. 기녀의 명단에서 제외시켜 준다면 집안을 일으키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말했다. 기녀의 명단에서 제외된 김만덕은 현재 김만덕 객주터가 복원된 곳에 객주집을 차리고 제주의 특산물인 미역과 전복, 그리고 양반층 부녀자의 옷감과 장신구 등을 싸게 팔아 부자가 됐다고 한다.

여성의 모든 재능이 억압받던 조선에서 김만덕의 성공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김만덕의 생활은 아주 검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 14년(1790년)부터 18년(1794)까지 5년간 제주에는 흉년이 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다.

김만덕은 전재산을 내놓아 배를 마련하고 육지로 건너가 연해에서 곡물 500여 석을 사왔는데, 이 중 50여석은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줬다. 나머지 450여석은 모두 관가로 보내 구호물품으로 쓰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는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정조는 김만덕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내의원인 ‘의녀반수(醫女班首)’직을 하사하고 소원을 물었는데, ‘금강산 구경’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정조는 김만덕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울것을 지시했다. 그 후 문신이자 정치인인 채제공이 '만덕전'을, 병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의 선행을 '시'로 썼다.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 역시 김만덕의 선행을 듣고 후손 중 한명인 김종주(3대손)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 그의 이야기 후세에 널리 퍼지다

1976년 제주도민의 성금으로 제주시 건입동에 모충사가 건립됐으며, 이때 고으니모르(화북동)에 있던 김만덕의 묘소가 이 곳으로 옮겨졌다. 2000년 재발족한 김만덕 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는 2004년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사업회는 그동안 김만덕 관련 유물을 제작하고 교육자료를 발간하는 등 김만덕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힘써왔다.

사업회는 다음 달 개관 예정인 ‘김만덕 기념관’ 민간위탁 수탁자로도 선정됐는데, ‘나눔 정신’을 중점으로 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김만덕의 일대기는 지상파의 전파를 탄 적도 있다. ‘거상 김만덕’은 2010년 3월부터 6월까지 KBS 1TV에서 방송됐으며, 배우 이미연·한재석·박솔미·하석진·고두심씨 등이 출연했다.

김만덕은 BPW(전문직여성세계연맹) 총회에서도 회자된 바 있다. BPW는 100여개 회원국이 가입돼있는 단체로, 전 세계 여성의 권한강화를 모색하고자 창립됐다. 지난해 5월 말 제주에서 개최된 BPW 총회에서는 김만덕이 ‘핵심 아이콘’이었다.

당시 ‘한국의 여성 지도자 김만덕’이라는 세션에서는 다양한 주제발표가 있었으며 ‘BPW 김만덕 상’도 제정된 바 있다.

 

건입동의 유래
‘동착이’‘사택이’‘고으니모루’ 등 작은 마을 모여 형성

건입동에 따르면 건입동의 옛 이름은 건입리다. 건입리의 유래는 신라시대 고을방의 15대손인 고후와 고청이 신라에 갔다가 이 곳으로 돌아와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한 건방의 맥(脈)이 들어왔다고 해서 건입리로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건입동은 350년 전 산지천 하류를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됐고, 1955년 제주시에 편입돼 동(洞)이 됐다. ‘동착이’, ‘사택이’, ‘고으니모루’ 등 작은 마을이 모여 형성된 건입동은 어업과 농업이 주산업이었는데, 제주항이 개발되면서 상업위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입동 하면 ‘산지천’이나 ‘사봉낙조’ 등을 떠올리지만, 등명대(燈明臺)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도대불’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한 등명대는 제주 지역에서 야간에 배들이 무사히 귀항할 수 있도록 항구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점등에 사용됐던 원료로는 송진이 많은 소나무 가지나 고기기름 등이다.

건입동은 1990년대에 이르러 등명대의 불빛이 잃어가자 고산·대포·보목 ·애월 등 8개의 등명대를 재현했다. 건입동은 마을의 역사와 문화, 자연경관과 유산들을 활용한 '건입동 박물관 마을만들기'를 추진했다. 건입동은 이 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등명대거리’를 비롯해 ‘서부두 명품횟집거리’, ‘동자복 복신미륵 민속공원’등을 조성했다.

건입동은 ‘등명대’ 거리를 조성, 고산·대포·보목·애월 등에 있었던 8개의 등명대를 마을 곳곳에 재현했다.

건입동은 마을의 역사와 문화, 자연경관과 유산들을 활용한 ‘건입동 박물관 마을만들기’를 추진했다.

건입동은 이 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등명대거리’를 비롯해 ‘서부두 명품횟집거리’, ‘동자복 복신미륵 민속공원’등을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