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마공신’ 김만일과 제주 

2015-04-27     제주매일

최근 소설책 하나를 간만에 손에 쥐었다. 제목은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이야기’. 역사소설가 권무일 선생님이 쓰신 것이다. 저자는 몇 년 전 제주에 정착해 살면서 의녀 김만덕 등 제주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

김만일(1550~1632년)은 조선시대 선조 임진왜란 때부터 정묘호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수백마리의 말을 진상해 헌마공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만일은 국영목장이 아닌 개인목장에서 수천마리의 말을 기른 사람으로 말에 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제주도내 국영목장(10소장)의 말이 모두 합쳐 2만~3만 마리 정도였는데 김만일 개인이 운영한 사목장의 말이 3000~5000마리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원읍 의귀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만일은 정의현 일대에서 2마리의 수말로 목장을 일구기 시작한다. 이 수말이 한라산에 들어가 100마리 암말을 데려와 새끼를 낳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수백마리가 됐다고 한다.

그는 또한 정병으로 국가에 대한 국역에 종사해 벼슬을 얻기도 했으며, 준마를 고르는데 탁월했다고 한다. 말의 수가 많아지자 목장의 규모도 커지고 ‘테우리’ 등 말과 관련된 종사자가 많아져 당시 제주지역경제에도 한 몫을 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김만일의 말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김만일이 죽고 난 후 10소장 이외에 1658년 산마장을 설치하고 그 자식들에게 산마감목관 직을 줘 국영목장으로 흡수시킨다.

산마장(침장·녹산장·상장)은 지금 조천읍 바농오름에서 대록산·소록산을 거쳐 사려니오름 일대까지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곳이다. 일전에 남도영(제주도 목장사 연구자) 박사와 산마장, 김만일 묘역 등을 답사한 바 있는데, 지금의 정석비행장일대로 광활한 지역임을 느낀 바 있다. 산마감목관은 조선후기까지 218년간 세습됐다.

김만일 생전에 부임하는 고을 수령은 말에 대한 수탈이 심했다. 고을 수령들은 응하지 않으면 관가에 아이를 가둬 매질을 하거나 처자식을 가둬 고통을 줬다.

김만일은 종마를 보존하기 위해 말의 귀를 찢거나 눈을 멀게 했다. 대(종마 보존)를 위해서 소(말의 고통)를 희생시켜야 했다. 말을 사랑하는 그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의 고민의 깊이에 공감이 간다.

소설책의 저자는 다가올 전란에 대비해 전마 육성을 강조한 율곡선생과 만주세력을 염려해 성숙한 외교정책을 한 광해군의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척박한 땅에 살면서 수많은 재해로 힘든 나날을 살고 제주사람들, 관리들의 착취와 가렴주구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해왔던 제주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려고 했다.

그리고 대략 400년이 흐른 지금의 제주는 김만일이 살았던 조선시대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자연재해는 시멘트로 막고 있을 뿐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더해 현대사회의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재해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자연 환경적 측면에서 보면 악화됐을 뿐이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제주의 산과 들이 파헤쳐지며 신음하고 있다.

관리들의 행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더욱이 현대 자본이 물밀 듯이 제주에서 들어와 판을 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듯한 포장지에 숨겨 제주를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어도 ‘개발’의 논리에 눈이 멀어버린 것 같다.

우리가 물려받은 아름다운 제주에 오늘과 내일에 대한 ‘고뇌’가 없다. 율곡의 우려까지 아니더라도 광해군의 처신만큼은 못되더라도 김만일과 같이 말에 대한 애정만큼의 제주사랑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이 주체가 돼 아름다운 제주를 만들어가고 후세에 물려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