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간직한 황사평 마을로 통하는 관문
[길 따라 이야기 따라 9] 이재수의 난과 관련있는 제주시 ‘황사평길’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제주에는 양제해의 모변(1813년), 강제검의 난(1862년), 방성칠의 난(1898년), 이재수의 난(1901) 등 대표적인 민란이 벌어졌다. 이번에 본지가 소개할 길은 ‘황사평길’로,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정부의 조세수탈 등이 원인이 됐던 이재수의 난과 관련이 있다.
취재를 위해 제주시 황사평길(화북동)에 위치한 천주교 성지를 방문했다.
황사평길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이재수의 난’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시 이도한일베라체아파트를 지나 ‘황사평길’이라 적힌 안내판 바로 옆길에서 5분 정도 가다보면 ‘황사평 복지회관’을 찾을수 있다.
복지회관 북서측 길, 겨우 차 한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골목을 따라 1분정도 가다보면 천주교 성지와 마주한다.
▲황사평 천주교성지, 천주교인들 잠들다
‘이재수의 난’은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제주도 신축교난, 신축민란, 신축성교난, 제주민란 등으로도 불린다. 난은 제주출신 현기영 소설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의 소재가 됐고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때는 18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는 최근 복자(福者) 반열에 오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로부터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래됐고, 1899년에는 프랑스의 페이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이 시기 신자는 200여명, 예비 신자는 600~700명에 이르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제주에 평안도 출신 강봉헌이 봉세관(封稅官)으로 부임해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며, 세금 징수의 실무는 천주교 신자가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도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거세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또한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된 것은 1901년 2월에 있었던 도민 오신락의 죽음 때문이다. 천주교인은 오신락이 감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했지만, 노인의 두 아들은 천주교인들에게 매를 맞아 죽었다고 했다.
오신락과 앙숙 관계였던 현유신 부자는 이 사건이 ‘천주교’인들의 탓이라며 유언비어를 퍼트리기에 이른다. 봉세관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던 대정군수인 채구석과 관노 이재수 등은 ‘상무사’를 설립, 관덕정 성문을 지키고 있던 300명이 넘는 천주교인을 죽였다.
이때 프랑스신부 2명은 중국 상하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연락, 군함이 출동했지만 이미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 측면에서 보면 ‘도민들에게 순교당한 사건’이지만, 도민의 입장에서는 ‘민중항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뒤 이재수 등 난의 주모자는 교수형을 받았고, 채구석은 도민의 청원과 배상금 문제로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황사평길에 위치한 천주교성지에는 이때 죽은 천주교 신자들이 묻혀있다. 원래 이들의 시신은 별도봉 밑에 가매장한 상태로 1년 동안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03년 프랑스와 합의, 천주교성지를 이재수의 난 희생자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묘지로 내주게 된다. 원래 천주교 측은 지금보다 땅을 크게 차지하려고 했지만, 황사평 마을의 유지들이 이의를 제기해 지금 정도의 묘지 면적으로만 허가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제주 출신 최초의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와 1899년 제주에서 활동한 외국인 성직자를 기리는 공덕비도 세워져 있다. 현재는 일반 천주교 신자들도 이 곳에 묻힌다.
▲“4·3사건으로 황사평 중요 기록 모두 소실”
김공록 황사평 마을회장과 정경철 전 마을회장 등에 따르면 주로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활용됐던 황사평 마을의 명칭은 원래 ‘황사평 부락’이라 불렸다고 한다. 검은 땅이 없어 누렇고 지형이 뱀의 모양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새왓’이라고도 하는데, 황새가 앉은 밭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재수의 난이 끝나고 1920년대 초기, 황사평 인근에 있는 영평동과 영평하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거주했다. 그러다 제주4·3사건 때 마을주민이 집단으로 학살당하고 마을이 전소돼 없어져 소중한 자료 또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황사평 마을은 1962년, 행정에서 ‘마을복구정책’을 펴면서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2년만에 200여가구가 이 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현재는 6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김공록 회장은 “우리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제주4·3사건으로 모두 소실돼 너무 안타깝다”며 “어르신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가 일일이 기록한 자료로 그 당시가 어땠는지 추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 성지를 ‘공동묘지’라고 인식, 마을 방문을 꺼려하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황사평 마을과 천주교 성지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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