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노래
지난달 26일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제주시 양지공원을 나섰다. 쌀쌀한 날씨 속 품에 끌어안은 유골함의 온기가 내 몸에 전해져 왔다. 용광로의 열기로 인해 채 식지 않은 유골의 잔열(殘熱)이건만 내겐 마치 어머님의 따스한 체온처럼 느껴졌다.
우리 나이로 치면 어머님은 올해 91세. 사람들은 호상(好喪)이라고 했다. 아들 셋, 딸 셋에 증손까지 합치면 손주만도 스무 명 넘게 보셨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욱이 마지막 가는 길마저 너무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선종(善終)이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머님의 삶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여느 사람들처럼 질곡(桎梏) 그 자체였다. 상당히 완고하고 엄격했던 분을 남편으로 두셨기에 평생을 숨죽이고 사셨다. 자신의 주장이라곤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벗삼아 늘어놓던 푸념이 전부였다. 그것조차 아버님께 곧잘 들키곤 했는데 그때 계면쩍어하던 모습은 아직도 내게 ‘퀭한 슬픔’으로 남아 있다.
어머님이 평생 남을 이겨본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당신은 자식들조차 제대로 이겨보질 못했다. 불같은 성격의 아버님 때문에 혹시 주눅이라도 들까봐 자식들 다독이기에 급급하셨다. 없는 살림도, 자식들의 불평이나 불만도 모두 당신 몫이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먹물보다도 더 검게 타들어 갔을 마음 고생을 과연 어떻게 감당하고 사셨는지 죄송한 심정 금할 길이 없다.
38년 전 아버님을 여읜 후 어머님은 농사일과 바느질로 6남매를 거의 홀로 키우셨다. 나이가 들어 농사일을 그만둔 후에는 수의(壽衣)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그게 생업이기도 했지만 그 속엔 죽은 사람들의 혼을 통해 자식들 복을 빌어보려는 요량(料量)도 끼어 있었다.
평생을 바느질로 사셨기에 어머님은 치매와는 무관해 보였다. 그것은 동네 사람들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팔순이 되던 해 ‘황혼(黃昏)의 덫’이라 불리는 치매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이후 12년을 그 굴레에 갇혀 살았다.
다른 병들과 달리 치매는 단순히 과거의 소중한 기억만을 잃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인성과 인격을 파괴하고 가족 간의 관계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치명적인 병이다. 때론 절규하고 싶어도 들어줄 대상조차 없고, 혼자서 설움에 북받치다가 체념하기 일쑤인 게 치매환자 가족들의 삶이다.
그러나 환자 본인보다야 더 하겠는가. 원래 자그마하신 분이라 휠 등도 없을 것 같았는데 유수(流水)와 같은 세월 탓인지 영락없이 꾸부정한 노인네가 되셨다. 치매를 앓으며 몸뚱아리도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3년 전 부터는 치매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자식마저 알아보지 못하셨다. 당신의 이름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잊어버린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기거하던 요양원을 찾아 얼굴을 맞대도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눈만 꿈벅이셨다.
간혹 내뱉으는 말 또한 대상이 없는 혼잣말이다. 천근 만근으로 내리 눌렀을 고단했던 삶의 흔적을 어디에다 묻어 감추셨는지…. 한편으론 그런 무망(無妄)의 모습이 차라리 속편하기도 했지만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논어에 ‘수욕정이풍부지 자욕효이친부대(樹欲靜而風不止 子欲孝而親不待)’이라 했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에 와서야 절실하게 다가오는 공자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어머님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다. 치매 어머님을 달래느라고 소리지르며 싸우던, 서로 대화라도 통했던, 아니 살아 계셨던 그 순간이 새삼 그리울 것 같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서 불러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집은 있어도 사랑이 없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이해인 수녀님의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어머님,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삼가 영면(永眠)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