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은 ‘정치작물’이다
감귤값 하락에 농가 수심 깊은데
담당 공무원 자리바꿈 다반사
농정당국 耐性 생겨 태평인 듯
농협 명품감귤 사업도 지지부진
통합마케팅·대표브랜드 ‘허우적’
‘생산실명제’보다 ‘정책실명제’ 시급
요즘 감귤이 심상치 않다. 유통처리가 원활치 못해 가격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노지감귤이나 만감류나 사정이 비슷하다. 여기에 야심차게 내세웠던 정책도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농가들이 드러내놓고 아우성을 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이런 불안감은 지난해 10월 중순 노지감귤이 출하되면서부터 예견됐다. 맛과 외관 등 상품성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러다보니 노지감귤 출하 초기부터 가격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좀처럼 반전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도매시장 상품 10㎏ 상자당 경락가가 1만원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강풍과 잦은 비날씨로 열매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맛도 예년과 같지 않아 소비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 탓이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수확한 감귤의 30% 이상은 비상품으로 처리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최근에도 가공용 처리 대란이 계속되면서 집하장마다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달들어 본격 출하를 시작한 한라봉과 천혜향, 레드향 등 만감류 가격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생산량도 많지만 얼어붙은 소비심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아 구매력이 크게 덜어진 탓이다. 노지감귤의 대안으로, 한동안 희망의 감귤로 호시절을 보낸 한라봉은 이제 더 이상 ‘고급감귤’이라는 타이틀을 욕심내지 못할 모양이다.
상황이 이렇게 호의적이지 않지만 감귤농정을 책임지고 있는 당국은 적어도 외관상으론 태평이다. 그만큼 내성(耐性)이 생긴 모양이다. 감귤유통 상황이 비상한 시기에 제주도는 유통과 정책부문 관계 공무원들을 갈아치웠다. 업무를 파악하고 시장 분위기를 익히는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알만 하면 바꾼다. 작년에는 치밀한 준비도 없이 상품규격을 재설정한다고 섣불리 나섰다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멈췄다. 올해산 노지감귤부터 적용한다고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감귤정책만큼 변수가 많은 경우도 드물다. ‘정치작목’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붙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다.
현 정부의 대표적인 감귤정책의 산물인 ‘명품감귤’사업도 할 말이 없긴 마찬가지다. 제주농협 소속으로 사업단이 작년 출범했지만 조직체계는 아직도 느슨하다. 유통창구 단일화는 조직간 이해관계에 매몰돼 진척이 없다. 애초 작년 5월 하우스감귤부터 통합 마케팅 시범사업에 착수, 노지감귤부터 본격 시행하겠다고 호언했었다. 작년 3월 얘기다. 1년이 다 지나가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용역은 해보지만 용역일 뿐이다.
대표브랜드 제정도 원점에서 맴돈다. 마치 늪에 빠진 모양새다. 농협관계자, 전문가, 소비자를 대상으로 수차례 여론수렴을 했지만 헛수고다. 결론이 나는가 하면 원점이다. 이건 신중한 논의와는 다른 문제다. 자신감부터 부족하다. 유력한 브랜드명으로 의견을 좁히지만 외부 입김 한 번 훅 불면 마구 흔들린다. 눈치 살피다 시간 다 보낸다. 대표브랜드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할 지경이다.
대통령 공약 사업이라 ‘상명하달(上命下達)’식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속도가 더뎌 ‘피로감만 쌓이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민선자치시대가 개막된 후 숱한 감귤정책이 명멸했다. 그만큼 생명력이 짧았다는 얘기다. 감귤산업이 여전히 지금 수준에서 머무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100년을 내다보는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 농정당국과 생산자단체가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는 곤란하다. 제주도 당국은 올해부터 ‘감귤생산 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더 중요한 건 ‘감귤정책 실명제’다. 농가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책당국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정책은 진정성이 결여되기 쉽다. 2~3년 적당히 맡은 업무 처리하다 떠나면 그만인 ‘선무당’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올해는 제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