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 배우며 할망, 하르방의 지혜 속으로 '풍덩'

[작지만 행복한 우리학교] 2. 광령(光令)초등학교
1년차 제주어교육 시범학교
세대간 소통, 인성교육에 도움
자연스레 제주 전통문화 습득도

2014-11-18     문정임 기자

▲ 살아있는 제주어 교육

"자, 시원이, 정낭이 뭐지?"
"대문요!"
"자, 그럼 몰은?"
"말요!"
"다음, 세와신디는?"
"세웠는데에요"

"이번에는 정낭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자, 보세요. 서진이네 집에 갔는데 정낭이 이렇게 두개만 걸쳐져 있어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요, 저요!"
"응 그래 시원이 해봐"
"두 개 올려졌다는 거는 저녁에 온다는 거에요. 그러니 집으로 돌아갔다가 저녁에 다시 가면 서진이를 만날 수 있어요."
"맞아요, 잘 했어요. 정낭은 제주도 전통 가옥에서 대문의 역할을 하는 나무 기둥이죠? 집 주인은 정낭의 모양으로 자신이 언제쯤 집에 올 것인지를 알렸어요. 제주에는 태풍이 잦아 일반 대문은 설치하지 않았고, 그러나 가축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정낭을 생각해냈어요. 알겠죠? 여러분!"

광령(光令)초등학교(교장 함석중)가 재미있고 살아있는 제주어교육으로 재학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초 제주도교육청으로부터 제주어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되며 관련 수업이 본격 이뤄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취재기자가 방문한 지난 12일 반 별로 제주어 교육 공개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중 22명의 학생이 옹기종기 모인 3학년 2반에서는 '문화 중심의 제주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교사는 쉬운 제주어를 가르치며 말 속에 담긴 제주문화의 특징을 알기쉽게 설명했다. 아이들은 무척이나 재미있어 했다. 대부분이 밭농사를 짓는 농촌지역 가정의 자녀들이다보니,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제주어나 제주문화의 일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수업 중간중간 "어, 나 저거 알아!" "우리 할머니가 잘 쓰는 말인데"라는 아이들의 감탄사같은 외침이 수업에 활기를 더하기도 했다.

교실 곳곳에는 아이들이 앞서 작업한 제주어 수업 결과물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2014년 11월 6일의 광령초등학교 3학년 2반 조나단의 일기. 날씨 벳이 과랑과랑. 제목 미끄럼틀. "오놀 린이랑 고찌 미끄럼틀 타멍 놀았수다. 지꺼져성 곱닥혼 웃음 고장이 피어났수다. 내려갈 때 시원한 보름이 이래착저래착 하였수다. 친구랑 고찌 노니까 촘말 하영 좋았수다. 영 기분이 좋은 날은 처음이우다"

3학년 2반 오영서의 제주어 자작시. '봄비' '혹교 가는 질/봄비가 자록자록/우리 반 순이가 비를 맞으멍 감수다/나가 우산 이시민 거씬 받쳐줄 건디......'

아이들은 특정한 날이 아닌, 평상시의 모든 수업에서 제주어를 폭넓게 활용하고 있었다. 국어와 창의체험 시간은 물론, 교내 백일장이나 일기쓰기를 통해서도 제주어를 요긴하고 쓰고 있었다. 더러 표기가 틀린 부분이 눈에 띄었지만,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제주어 사투리를 꾹꾹 눌러 썼을 모습을 생각하니 괜실히 고맙고 장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제주어교육 시범학교답게 교실마다 내걸린 교훈도 제주어였다. '몸과 모심이 건강한 사름이 되쿠다'. 제주어의 음가적 느낌처럼 군더더기 없고 무뚝뚝하지만 본질을 잘 표현한 문장이었다.

▲인사를 잘 하는 아이들

학교를 방문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이들의 밝은 인사성이었다. 복도에서, 화장실에서, 운동장에서 곳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외부인에게도 거리낌없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침, 하교시간에 맞춰 자녀를 데리러 왔던 한 학부모도 "아이들에게 인사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함석중 교장은 이 같은 아이들의 붙임성과 인사 습관이 제주어 교육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내가 문화에 식견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언어는 정말 중요하고 보배로운 것 같아요.제줏말 속에 버릴 게 하나도 없거든. 내 할머니, 내 부모를 자연스레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이웃주민을 모두 가까운 '삼촌'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활동. 그래서 인성교육에 도움이 크다고 생각하죠"

제주어를 사용하며 어른들의 언어에 동질감을 느끼고, 제주문화의 우수성을 배우면서는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체득한다는 이야기다. 함 교장이 광령초 부임 2개월여 만에 언어교육을 인성교육이라고 강조하며 제주어 교육의 전도사가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언어는 문화를 이해하는 디딤돌

제주어 교육은 제주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로도 이어졌다. 실제 학교 한 편에는 제주 의식주와 관련한 민속품과 제주 가옥을 연상케 하는 실물 크기의 쉼팡이 전시·설치돼 있다. 남보시·국자·눈접시·굽쟁반·남사발·통사발 등 언젠가 창고에서 한 번쯤 보았던 물건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진열돼 있다. 옛날식 주물 재봉틀과 도구리(함지)·안반·절구대·돔베(도마) 등은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안거리와 밖거리로 이뤄진 제주 특유의 가옥 구조는 마을에서 아직까지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연, 상방(마루)·구들(난방)·정지(부엌)·고팡(창고) 등의 이름들도 금세 외울 수 있다. 텃밭을 '우영'이라고 하고, 골목과 집을 잇는 길을 '올레'라고 하는 정도는 이 곳 아이들에게 쉬워도 너무 쉬운 문제다. 

▲광령초의 오늘

광령(光令)은 옛부터 중산간 마을 특유의 밭농사와 축산에 주력해 왔다. 읍에서 손꼽히는 감귤 주산단지이기도 하다. 애월읍 마을 중 시내와 가장 가깝고 자연 풍광이 좋아 최근에는 전원 주택지로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무색하게 광령초는 학생 수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형중이 신설됐지만 제주도 읍면지역 중학구 배정 지침에 따라 광령초 졸업생들은 노형중보다 먼 귀일중으로 일괄 배정되기 때문.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광령초는 몇년전 동창회 수칙을 개정해 자격 대상을 '졸업생'에서 '재학했던 자'로 확대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고학년이 되어 전학을 가던 추세가 아예 처음부터 인근의 노형초나 해안초, 도평초로 입학하는 경향으로 바뀌면서 불과 10년전 400여명에 가깝던 학생들이 현재는 243명으로 급감했다. 특히 2학년은 1개반만 남아 있다.

광령초 학구(광령 1~3리, 고성 2리)에 현재 거주하는 취학전 아동 수는 2015년 62명, 2016년 53명, 2017년 52명. 숫자 자체로는 현재의 2개반이 유지될 수 있는 규모지만 이들이 모두 광령초로 온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 학교는요

하지만 광령초에는 광령초만의 매력이 있다. 1992년 고성2리에 있던 상전분교가 폐교되면서 통학버스가 운영, 조석으로 자녀를 태워오고 태워가야 하는 부모들의 번거로움을 6년 내내 덜 수 있다.

학교 앞으로 올레코스(17코스)가 지날 만큼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 분위기를 자랑한다. '들어서는 순간 속세의 근심이 사라진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무수천(無愁川)'. 그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 수많은 폭포와 소(沼)는 감춰진 진짜 제주의 속살이다. 이 곳에서는 아빠·엄마, 할머니·할아버지의 추억과 조우할 수 있다. 담이 없는 광령초는 학교 자체가 올레의 쉼팡이기도 하다.

여기에 장애 학생을 위한 엘리베이터 시설과 천연잔디 운동장, 학생 안전을 위한 고화질 CCTV 시설은 학생들의 생활 동선 하나하나를 안전하고 풍요롭게 한다.

최근 제주도교육청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 하고 교육 수요자들에게 과도한 불편을 야기하는 중학구 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학교 학교군 및 중학구 전면 재조정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내년 상반기 용역을 거쳐 2016년부터 새로운 방식을 적용해나간다는 계획. 광령초의 현행 중학구 배정방식도 개선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한 가지. 지난 1년 제주어교육을 시작하면서 각 가정에서 세대간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는 사실이다. "옛날 이야기만 하던 할머니의 입에서 내가 아는 단어가 나오니 아이들이 할머니를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한 거에요. 길 가면서 무심코 보아왔던 촌스러운 것들이 자랑스러운 제주의 전통문화였다는 것도 깨닫게 됐고요."

함석중 교장은 제주어 교육이 아이들의 가정생활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 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지금 광령초 아이들은 정규수업 과정 속에서 제주어를 배우는 제주도 최초의 수혜를 받고 있어요. 수업도 최초, 혜택도 최초, 언제라도 내 마을, 내 고향을 당당하게 추억하고 얘기할 수 있는, '행운아'들인 거죠. 그렇지 않나요?" [제주매일 문정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