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과 협치

2014-10-07     제주매일
감귤 품질기준 규격 조정은 예정된 수순으로 진행됐다. 조금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결론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감귤정책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닌 것을 제주도정 관계자들은 새삼 확인했을 것이다.

민선 6기 원희룡 도정이 출범한 후 제법 야심차게 추진한 감귤품질 기준 규격 조정은 시행을 1년 연기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제주도 당국은 관련규정을 담은 ‘감귤조례 시행규칙’을 개정하되, 내년 9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제주도가 추진한 감귤 품질기준 규격 조정은 현행 11단계에서 상품 5단계로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현재 11단계인 품질 규격을 크게 줄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품 7단계를 2단계 줄이는 것이다.

지금도 상품은 2번과에서 8번과까지이기 때문이다. 0, 1번과 9, 10번과는 비상품으로 분류돼 어차피 시장 출하가 차단되고 있다.

현행 1번과 규격을 47~51㎜에서 49~53㎜로 2㎜ 늘려 가장 작은 크기인 ‘2S’로, 55~56㎜인 기존 3번과는 4번과까지 포함하는 54~58㎜로 재설정해 ‘S’로 조정하는 것이 이번 시행규칙 개정의 골자다. 5, 6번과는 ‘M’, 7번과는 ‘L’, 8번과는 ’2L’로 정리했다.

2004년부터 현행 기준을 담은 개정 감귤조례가 시행된 후 10년 동안 1번과 상품 여부에 대한 논란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제주농협과 감귤연합회가 주축이 돼 이 문제에 대한 용역을 발주해 올해 최종 방향을 잡은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대표적인 감귤 생산자단체인 농협이 제대로 의견수렴을 하고 감귤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면서 추진했는가 하는 점이다. 소비자 선호가 기준 조정의 가장 큰 이유라지만, 그건 상품성의 문제다. 맛의 문제라는 것이다. 크기에 매몰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얘기다.

제주도 당국은 지난 2일 감귤 품질기준 규격 조정을 발표하면서 ‘수평적 협치’ 활동의 결과라고 자평했다.

도의회와도 협력(협치)관계를 유지했다고 덧붙였다. 민선 6기 도정의 키워드인 ‘협치’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제주도는 지난달 2일 종합대책을 내놓고 정확히 한 달 만인 지난 2일 시행규칙 개정과 시행 유보를 결정했다. 한 달 만에 수년간 켜켜이 쌓인 논란을 정리하는 듯 했지만 또 다른 논란의 불씨만 만들었다.

정말 ‘협치’가 작동해 이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을까. 제주지역에서 적어도 농정문제는 제주도 당국이 ‘갑(甲)’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건 도 당국의 의지로 못할 게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

감귤 문제도 마찬가지다. 생산자단체인 농협과 상인단체가 있지만 정책 주도는 제주도가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주요 감귤 현안에 대해 농협 등과 협의는 하지만 도 당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했어야 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말 그대로 ‘협치’의 과정을 거쳐 결론을 도출했다면, 이번 감귤문제는 이렇게 어정쩡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도의회가 도정의 방향과 다르게 나가자 서둘러 ‘출구전략’을 마련한다는 낌새는 어렵지 않게 보였다.

‘협치’니 ‘의견수렴’이니 하면서 군색하게 설명하지만, 남은 것은 혼란뿐이다.

올해산 노지감귤 유통처리가 마무리되는 내년 3월쯤엔 어떤 얘기들이 오갈까. 중요한 정책을 논의할 때 힘의 논리나 진영의 이해관계가 개입돼선 곤란하다. 감귤 품질기준 조정 과정에서도 할 말은 많았지만 못하고 숨죽인 이들은 없었을까.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추진력에 밀리고 세(勢)를 업지 못해 뒤로 물러난 측들도 있었을 것이다.

감귤 품질기준 규격 조정 논란이 일단락된 것 같지만, 우려했던 문제는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방울토마토만한 크기의 노지감귤이 대한민국 대표 시장인 가락동 도매시장에 상장돼 3000원에 경락되고 있다. 1번과가 아니라 0번과가 상품에 벌써 포함된 꼴이다.

논란은 이제 시작이다. 논란의 끝에는 책임도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