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엔 왜 정년이 없지

2014-09-15     제주매일
“언제까지 당신 밥상 차려야 하는 데.”
아침 한나절 텃밭에 잡초를 뽑는 일이 일상이 된 여름 어느 날, 산행에서 돌아온 남편이 점심을 달라고 하자 땀범벅으로 지쳐있던 내가 불쑥 말했다.
뜻밖의 소리에 기습을 당한 듯,  멍하니 쳐다보더니 겨우 한다는 소리가
“당신은 밥 안 먹어?”
“당신 식성에 반찬 만드는 일, 쉬운 줄 아세요?
“나야 장아찌나 찌개 하나면 충분해요.”
“그럼 나도 당신처럼 먹으면 되겠네.”
 평소 같으면 웬 망발이냐고 화를 내야 할 터인 데, 처량하게 기죽은 답이라니…….
 사람이 변하면 겁이 난다.
그가 결핵을 앓을 때 내가 청혼을 했다.
 끼마다 더운 밥에 새 반찬 차려 대령한지 사 년 만에 병을 끝내자 공부를 더 해야 한다며 서울행을 고집했다. 처음엔 가정교사 알바 뛰며 고학한다던 그가 몇 달 못가 구원을 요청했다. 자기 공부할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단다. 해서 하숙비를 보내기로 기꺼이 합의했다.
 그렇게 시작해 늘 그는 밖으로 돌고 집안일은 언제나 내 몫이 됐다.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고단하고 힘든 여정’  이 짧은 한마디  속에 내 한 생이 녹아 있다는 걸 누가 알까.
그는 아홉 남매의 맏아들이다. 시어머님은 딸 셋을 내리 낳으시다 첫 아들을 순산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춤을 추고 싶었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독자였던 탓에 가슴을 조이며 사셨던 것이다. 온 친척의 축하를 받으며 애지중지 키우셨다.
어부와 해녀인 부모님 밑에서 그는 싱싱한 해산물로 호강을 누리며 자랐다 해서 입이 까다로운 편이다. 그 비위를 맞추느라 내 젊음이 식초가 됐다. 요즘 들어 나는 이따금  투정을 부린다. 
“나 이제 그만할래. 당신이 마누라 밥 한번 해 줘 봐요.
 아니 당신 밥이라도 챙겨 먹어요.”
 “내가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그만 하겠다’는 소리 그만 좀 할 수 없어?”
 오늘 이전의 남편은 이처럼 당당했다. 
그래서 속으로 궁리 중이었다.
“결혼엔 왜 정년이 없지?”
 쉽게 갈라서는 세상이 됐지만 우리 세대에 이혼이란 아무래도 불편한 정서다.
살벌한 인간이 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고 그냥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아니라, 결혼 몇 십 년 살면 그만 둬도 된다는 조항 하나 서약서에 첨부하면 안 될까. 둘이 더 살겠다면 좋고, 자식들 다 키운 후엔 마음 편하게 따로 살아도 되는 뭐 그런 세상 안 올까. 
  헌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산행에서 미끄러지며 머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응급실에 달려갔다. 피 범벅이 된 셔츠를 보자 가슴이 쿵 소리를 냈다.
“얼마나 다쳤으면 저 모양인가”
 심장이 뛰고 피가 마르고 목이 탔다.
‘저 사람을 두고 정년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꿈을 품은 내가 어이없었다.
 누가 이 이치를 깨우쳐 부부란 일심동체라 했을까. 비록 정겹게 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가 아프면 내가 더 아프고, 그의 목숨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하는,  부부란  인연의 질긴 끈인 것을.
그가 무심히 손에 신문을 들고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거나 이따금 내 눈길이 그에게 가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래 저 자리에 어느 날  그가 없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사무치게 적막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