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해방신학

2014-08-26     제주매일
“‘개발’이라는 말은, 그 용어 자체가 제기하는 과정에 해당하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모호하게 만들고 일정한 한계를 설정한다. 그에 비해서 ’해방‘이라는 용어는, 역사 안에서 인간이 갖는 위치와 활동에 영감을 주는,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성서를 보면 그리스도는 해방을 가져온 분으로 등장한다.”-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A theology of liberation)’에서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은 1973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한국에서는 1977년 분도출판사에서 번역·출판됐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출판물에 대한 감시가 심한 때라, ‘해방신학’은 출간하자마자 배포금지 됐다. 그런데 어떤 경로를 거쳐 그 책이 나에게 전달됐는지, 나는 YMCA간사논문을 작성하면서 그 책을 인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해방신학’이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교황이 바티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전 세계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슈는 34년 전 살해당한 남미 엘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1917~1980)에 대한 ‘복권’ 문제였다. 로메로는 엘살바도르 군사정권이 자행한 암살·고문·납치 등 인권 탄압을 비판하다 1980년 3월 미사 집전 도중 무장 괴한 4명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1980년대 교황청은 해방신학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교리”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로메로 대주교를 복자(福者·Blessed)로 추대하는 절차를 되도록 빨리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로메로는 남미 해방신학의 상징적 존재였다.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돕고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다. 1971년 페루 예수회 성직자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출간된 이후, 같은 이름으로 해방신학은 정식화됐다. 프란치스코는 남미 출신 첫 교황이다.
브라질에서는 군사정권 시절 해방신학 전파의 거점 역할을 했던 ‘기초공동체’가 지금까지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에게는 ‘해방신학이 키워낸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파라과이의 페르난도 루고 등 중남미 국가들에 지도자들이 등장한 배경으로 해방신학의 정치·사회적인 영향력을 꼽을 수밖에 없다. 해방신학의 본질은 ‘가난한 사람에게 귀 기울이라’는 것으로 경제적 가난, 정치적 억압, 문화적 소외가 있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여러 오해를 받았던 해방신학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면서 ‘복권’돼 비로소 가톨릭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YMCA와 사회개발운동’ 논문에서 ‘해방신학’을 기본으로 “제주YMCA는 민중이 참여하는 지역사회의 사업계획으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여, YMCA가 실현가능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해방에 대한 염원이 오늘의 역사를 불태우고 있다. 모든 제약, 인간의 자아실현을 훼방하는 모든 장애로부터의 해방, 인간의 자유의 행사(行使)를 저해하는 온갖 요소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염원이 불타고 있다. 그 증거로서는 소위 저개발국가의 전형적 모델로 자처하는 선진공업사회 내부에서도 새롭고 교묘한 압제의 현태들이 적발되고 규탄받기 시작한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A theology of liberation)’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