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위의 삼팔선은 지워졌지만…

2014-07-06     제주매일
 하나씩 따로 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길다란 책상을 둘씩 같이 썼다. 둘이 같이 쓰는 친구는 짝꿍으로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때문에 짝꿍과 사이가 나빠지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남자, 여자가 짝꿍일 경우, 서로 사이가 좋아도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짝꿍끼리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런 신경전이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현장이 바로 책상 위였다. 책상 절반쯤 되는 곳에 삼팔선이라는 금을 그어놓고는 책이라도 조금만 넘어와도 서로 밀치고 다투곤 했다. 마치 영토싸움을 하는 것처럼, 반쪽나라의 국민이 아니랄까봐 한바탕 싸움까지도 불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손때가 반질반질 윤이 나는 책상위에 어김없이 그어져있던 삼팔선은 칼로 파서 골이 패인 책상도 있었다. 하지만 책상 위 삼팔선은 생활이기도 했지만 놀이였다. 놀이라고 하기엔 서글픈 놀이였지만 우리들의 그리운 학창시절 추억 속에 자리한 한 장면들이다.
짝꿍을 갈라놓는 삼팔선은 책상 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험을 볼 때면 지금도 옆 사람 시험답안을 볼까봐 책가방을 올려놓거나 팔로 감싸고 고개를 처박던 아이들 마음속에도 그어져 있다. 내가 이기기 위해 너를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둘러보면 우리 생활 곳곳에서 삼팔선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열려 있지 않은 사회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은 열려 있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경계하며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 승부가 필요치 않은 현장에서도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라는 심정으로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적개심 같은 무언가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게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 같아 씁쓸하고 부끄럽다. 적을 만들고 분리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자가당착에 빠져 위선을 일삼는 우리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기, 우리가 정말 성숙할 수 있는 길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끝낸 비언소라는 공연에서 나는 이런 우리들의 현실을 말하고 싶었다.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모른다, 내 탓이 아니다, 지시대로 따랐다 등등 핑계만 난무하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 싫어, 함께 느끼고 고민하자고 만든 공연이었다. 비록 관객이 차지 않은 썰렁한 공연이었지만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과는 긍정적인 소통이 이루어졌고 그 감동은 충분히 우리들 가슴을 뭉클하게 할 정도였다. 공연 후, 손을 잡아주며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앞으로도 지켜본다며 격려해주는 관객들을 보면서 반성 많이 했다. 어린 시절 책상 위 삼팔선 너머 짝꿍의 책이 살짝 넘어오기라도 하면 신경질 부리는 아이처럼, 나도 어쩌면 이런 순수한 관객들을 오해하고 거리를 두지 않았나, 관객이 없다고, 공연수익이 적다고 기운 빠지는 나도, 관객이 많은 공연에 왜 관객은 몰릴까 부러워하며 시기하지 않았나, 반성했다.
나는 연극인이다. 늘 관객에게 어떤 작품을 보여줄 것인가 고민해야하는 공인이다. 일그러지지 않는 시선으로 현실을 볼 수 있어야하고 입을 다물기보다는 내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한다.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서로 돕는 문화 만드는 일이 절실한 이 시점에, 내 마음 속에 그어진 삼팔선을 지우고, 우리는 좋은 공연으로 일조하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잡아본다. 그리고 잊지 말자, 열악한 연극 현실을 슬퍼만 할 게 아니라 관객들이 외면한 공연무대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