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역사는 제주마의 역사다

2005-03-30     제주타임스

제주는 예로부터 방성(房星:방은 28개성의 하나로서 방이 보이는 곳은 가축이 번창한다고 전함(天駟星:馬祖)이 임하는 곳으로 사나운 짐승들이 없어서 말 기르기에 적합한 곳으로 일컬어졌다. 

제주마는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이 보도와 10월 9일 신생대 제4기 사람과 각종 척추동물발자국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발표로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서 발견된 사람과 마(馬) 발자국의 화석으로 미루어 볼 때 조심스럽기는 하나 약 2000 ~5만년 전이므로 지금까지 밝혀진 것과는 달리 과연 어느 때부터 제주도에서 말이 서식하였으며, 고유종인지, 본토의 과하마(果下馬)인지, 어떤 계통인지 그리고 전래 등에 대하여 고고학, 고생물형태학, 역사학 등 여러 방면에서 더 연구하여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말이 출현한 시기인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아 그 지역도 북부, 중부, 남부지방에 고루 분포되었으며 지질학적 이 시기는 중신세ㆍ선신세로 본토와 제주, 중국, 일본까지 한 대륙에 속하였으므로 제주도에서도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3지마(三趾馬) 화석이 발견될 수 있으며 몽골마, 중국마의 馬祖인 프르제발스키마(Przewalski)가 제주마의 기원으로 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Przewalski마와 아시아 야생마인 Tarpan마의 특징인 만선(eel-stripe down:鰻線)과 다리 하단의 검은색(zebra marking)은 제주마에 있어서 유마(갈색:bay), 총마(회색:gray), 고라마(土毛 dun)와 거흘마의 외모와 모색이 아주 비슷하다.

1. 제주마의 유래와 사육

또한 기원전에 만주 서남방에 살았던 예(濊)·맥(貊)족의 과하마(果下馬), 만주 중앙부의 부여(夫餘)와 남방의 고구려 3척마(三尺馬)의 사육한 것과 한반도에 들어온 동예(예맥족)도 과하마를 생산 수출했다는 자료 등 북방 유목민의 의· 식· 주 풍습과 제주도를 비교했을 때 그 유사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제주마는 이들과 연계성이 있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상원 검은모루 동굴에서 사람과 말의 뼈가 발굴되었고 구석기시대 유적지인 덕천 승리산, 제원군 점말, 단양 상시리, 청원 두루봉 등과 삼성신화의 망아지, 송아지의 이야기 및 좪고려사좫지리지 탐라조에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사냥을 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는 기록과 1974년 한림읍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이빨)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제주도에 말이 棲息(서식)한 시기는 석기시대 말기로 추정된다.

탐라국 왕세기(耽羅國王世紀)에 의하면 서기 145년 탐라국 성방왕(聖邦王, 신라 일성왕 12년, 고구려 태조 대왕 93년, 백제 개류왕 18년)때에 중국, 일본 등지와 물화가 상통되어 탐라국의 조공선 및 상선이 토산품인 귤, 감, 탱자, 물소, 방성의 정기를 타고난 양마(良馬) 각성의 영을 타고난 녹리총 등을 교역하였고(良馬應房星之精神    蟄角宿之靈), 백제 무왕 10년(610년)에 탐라에서 준마(駿馬)를 백제에 바치자 백제에서는 이 말을 당나라에 바치니 당왕은 과하마이라고 이름 지었다.(本國獻馬干百濟 因獻唐曰果下馬), 그리고 신라는 대형종인 말을 사육되었으나 당나라(714-741년)왕실에 과하말을 진상되었다 것(朝事新羅暮百濟:탐라국이 662년에 신라에 종속)과 후백제 27년(918년)에 탐라는 공마를 오월(吳越)에 바치고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 등이 있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목감양마법(牧監養馬法), 문종 25년(1071)에 도거(섬에 설치한 목장) 관리를 제정한 후 문종 27년(1073)부터는 계속 탐라국에서 예물로 말이 진상되어 문·무관에게 하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탐라국의 명마(名馬)가 공마로 명성을 얻게 되어 고려 원종 14년(1273)에 삼별초군을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 일대에서 평정한 후 이곳에 일본·남송 경략의 군마(軍馬) 공급지로 만들고자 몽고군이 주군하게 되었다.

충렬왕 2년(1276)에 몽골에서 말 160필과 마 전문가들인 목호(牧胡:Hara-chi)들이 탐라국에 들어와 현재의 남제주군 성산읍 수산리(水山坪) 일대에 몽고식 마목장인 탐라목장을 건설한 것이 제주도 목장의 기원이다.

 충렬왕 3년(1277)에 마목장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동·서아막(東·西阿幕:Aimag:牧區:道縣)을 설치하였다. 동아막은 수산평에 설치되어 동부지역(동도, 정의)을 관장케 하고 서아막은 한경면 고산리에 설치되어 서부지역(서도, 대정)을 관리하였다.

조선시대의 마(馬)목장은 세종 11년(1429)년경에 제주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 중산간 지역(해발 200~600m)에 해안지역의 촌락(마을)과 경지와의 경계를 돌로 하잣(下場城)을 쌓기 시작하여 성종 24년(1493)이전에 완성되어 이를 10개로 나누어 10소장(목장)이 설치되었고 각 소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제주도의 전체 잣성 길이를 600리)
잣은 고어(古語)로 성(城)의 뜻이며 제주도의 중산간의 소장(목장 : 목마장)경계에 돌들(겹)을 길게 쌓은 돌담을 말하며  이를 흔히 잣, 잣성(城)이라고 부른다.

 한라산 고산지대(산림지대)에 쌓은 것이 상잣(上場城)이고 다른 소장의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았는데 이를 間墻(선잣, 간담)이라고 하며 이것이 각 소장과의 경계이다. 또한 정조 4년(1780) 김영수 목사때 제2·3소장에 間墻(선잣, 간담)936보(步)와 3소장의 횡장(橫墻)1,110(步),5소장에 횡장(橫墻) 1,530步 축성방식이 다른 상잣(橫墻)과 산마장의 간장(間墻:橫墻) 11,013보(步)를 쌓았으며 다른 소장의 상잣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계록(1846~1886)에 의하면 마정(馬政)에 당시 잣성을 장(墻, 담장)과 원(垣, 낮은 담)으로 상하 장원 (上下墻垣)을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은 교래리에서 한라산 쪽으로 상하잣성(물찻오름쪽)을 볼 수 있다.

제주목장은 중앙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 병조 및 사복시 지휘감독아래 전라감찰사-제주목사-감목관(제주판관, 정의 현감, 대정현감 겸임)-마감-군두-목자 등이 계급적으로 배치되어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주도내 말 사육필수는 태조 7년(1398)에 4414필(牛 1914두), 세종 11~16년(1429~1434)에는 1만 여 필이었으나 죽은 말이 2300여 필이었고 흠이 있고 체구가 작고 추쇄한 말이 3000여 필이 된 것은 수말(牡馬)이 실하지 않은 마정(馬政)이 미진(未盡)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종 27~28년(1445~ 1446) 9792~9780필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새끼를 낳은 말이 1160필, 손실된 것이 1990필이 된 것은 목양(牧養)에 마음을 쓰지 않은 까닭이며 다른 섬에서는 2만2406필, 唐(당)나라 70여만 필이 사육되고 있었다. 숙종28년(1702) 탐라순력도의 점마한 마(馬)는 9372필로 제주도내 국(國)사(私)마는 약 2만여 필이 사육되었다고 추정된다.

제주마는 세공품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바쳐 왔으며 세종 20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중종 7년에 150필, 인조 19년부터는 매년 200필과 산둔마 200필이 더 추가되었다. 조선 중엽까지는 말세공이 계속되었어도 말 사육 필수는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선조 27년(1594)에 정의현 의귀리 김만일(金萬鎰)은 전투마(戰馬) 500필을 국가에 헌납하자 정부는 헌납할 말을 사육할 목장을 10소장 내에 동·서별목장(현재 표선면 가시리경 따라비오름쪽 하잣성)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광해군 12년(1620)에도 500필의 말을 바침으로써 왕으로부터 헌마공신의 호와   숭정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직 (崇政大夫 五    都摠府 副摠官職, 從二品)을 제수 받았으며  효종 9년(1658)에 그의 아들 김대길, 손자 김려가 전마 208필을 다시 국가에 헌마하자 국왕은 동·서별목장을 산마장(山馬場)으로 만들어 목양케 하였으며 김대길을 산장 감목관에 임명하고 그 자손으로 하여 세습케 하였다. 그 뒤 고종 32년(1895) 폐지 될 때까지 218년간 경주 김씨 문중에서 83명이 산마장 감목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국력을 기울여 한라산 기슭에 10소장(57개 字목장), 김만일의 동서별목장(私馬牧場)을 발전시켜 산마장(山馬場:녹산장, 상장, 침장)을 설치한 것은 특기 할 일이다. 또한 좋은 말을 생산하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수출함으로서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제주마는 세계적(世界的)인 품종(品種)이라고도 할 수 있다(제주도목장사 남도영).

제주도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잣성은 일본강점기인 1913년부터 1930년에 제주도지적측량과 마을공동목장개설 및 후 미군 항공촬영, 대한민국 육군과 국립지리원의 항공촬영된 것을 하잣, 중잣, 상잣과 돌담으로  중산간 개발인 대단위 목장과 골프장 등으로 그 원형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잣성에서 사육된 제주마는 1986년 2월에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제주마와 잣성의 보존가치와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더 훼손되기 전에 정밀한 조사를 하여 조선시대 제주마목장의 울타리인 잣성을 목축문화재(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여야 하겠다. 울산광역시는 옛 목장인 남목마성(南牧馬城)의 돌흔적을 울산기념물 제18호로 지정보호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일본강점기, 4·3사건, 한국전쟁 및 농기계 보급 등 이용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1986년에는 제주마 사육두수가 1347필로 현저히 감소하여  정부는 제주마 70여필이 천연기념물 347호로 지정되어 제주도 축산진흥원에서 사육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과 생활해온 제주마 보호와 활용을 위해 1990년 제주경마공원에서는 혈통이 등록되지 않은 제주도에서 생산된 말로 경마를 시행하였으나 2000년 5월 10일 정부는 제주도축산진흥원에서 제주마를 등록기관 으로 지정 고시하여  17개의 유전인자(DNA)와 외모심사에 의한 혈통이 등록된 제주마가 2002년 7월 28일에 제주경마공원에서 경주를 시행하게 되었다.

현재 레저스포츠인 관광승마장과 마상무예 공연장 등이 도내 여러 곳에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이러한 결과 제주마 사육 필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450여필과 제주재래마, 제주산마, Thoroughbred종 등이 제주도에서 1만3000여필이 사육되고 있다. 
제주경마장에서는 경주마는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시행하고 있다.

▲제주마-혈통이 등록된 마(馬)

▲제주재래마-외모는 제주마와 유사한 체고가 125cm인 마(馬)

▲제주산마-교잡종마로 체고가 133cm이하 마(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