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말과 평판 '우리 선희'
사회라는 곳에 적을 두고 살아가다 보면 사람에 대한 말들은 공기처럼 떠다니기 마련이다. '평판'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말들은 때론 일치하기도 하고, 때론 엇갈리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가 정리하고 정의하는 평판을 우린 얼마나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까? 홍상수 감독의 15번째 장편 영화 '우리 선희'는 언어와 소통의 한계에 대해서 에둘러 말하는 철학적인 코미디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영화과 졸업생 선희(정유미)는 교수 추천을 받고자 최 교수(김상중)를 오랜만에 찾는다. 추천서 내용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선희는 최 교수와 저녁 자리를 마련하고, 최 교수로부터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는다.
한편, 선희는 옛 연인이자 최근 감독으로 데뷔한 문수(이선균)를 만나 "내 인생의 화두"라는 고백을 받고, 대학 선배 감독 재학(정재영)과 술을 마시며 그의 마음을 훔친다.
선희를 바라보는 문수, 최 교수, 재학의 시선은 일치한다. "내성적이고 때론 또라이 같은 면도 있지만 예쁘고 똑똑하고 머리 좋고 안목 있다"는 평가는 문수의 입에서 최 교수의 입으로, 다시 재학의 입으로 반복 재생산된다.
문수 등 세 명의 캐릭터는 영화에서 모두 선희에게 빠져든다. 그들의 판단 덕택에 그렇게 빠져든 것인지, 빠져들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이 들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셋은 "예쁘지만 또라이 같은" 선희 탓에 행복해하면서도 힘겨워한다.
문수처럼 "인생의 화두"라는 자세로 선희를 탐구하든, 최 교수 같이 오랫동안 잔잔했던 마음속에 파란이 일든, 재학처럼 무덤덤한 척하지만 이미 발길은 선희에게 향하든, 그들 각자의 고민은 선희로 귀결된다. 사랑의 농도와 풀어가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선희를 향한 그들의 마음만은 최소한 변함없다.
그런데 코미디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 선희에 대한 세 명의 평가는 정확히 일치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평가를 통해 선희라는 인물에 관객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희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고, 그 마음도 셋 중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게 되면서 캐릭터들이 말로 쌓아놓은 선희에 대한 이미지는 모래성처럼 산산이 부서진다. 떠다니는 말들은 그저 떠다닐 뿐 대상에 뿌리내릴 수 없는 셈이다.
'말'과 '평판'을 화두로 내세운 작품답게 대화 장면이 많다. 문수-선희, 문수-재학, 재학-선희, 재학-최 교수, 최 교수-선희로 이어지는 술자리 대화 장면은 무려 25분에 달한다. 88분의 상영시간 중 커트 없이 촬영된 이 다섯 장면의 롱테이크(오래찍기)가 전체 영화의 28%에 달한다.
카메라도 클로즈업을 철저히 배제하며 인물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하고, 술집 어딘가에서 일어날 것 같은 사실적인 장면도 잇따르는 등 영화는 최대한 '사실'에 다가가려 한다.
이처럼 호흡이 길고, 사실적인 상황을 홍 감독이 찍을 수 있었던 건 연기 잘하는 배우들 덕택이다. 이선균·김상중·정재영·정유미 등 주연들의 연기는 인공조미료 하나 없는 장국을 먹는 듯 담백하다. 처음 출연하는 정재영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우리 선희'는 빠른 전개와 반전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상업영화에 물린 관객이라면 단비 같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퍼즐과 퍼즐을 맞춰가는 지적인 재미도 있고, 그저 마음 편히 낄낄대다가 나오기에도 부담 없다.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로 제66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한국영화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9월12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상영시간 88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