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체육은 분리돼야 한다”
박민호가 만난 제주체육 버팀목
제주체육 산증인 고시홍 고문 체육계에 쓴소리
황량한 오라벌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경기장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체육의 변방이었던 제주가 그 중심으로 올라서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지난 1983년 시작된 오라벌(제주종합경기장) 조성사업은 1년여에 걸쳐 마무리된다. 재정 부담이 컸지만 군부독제시절 대부분의 경기장은 기업들의 기부체납 형식으로 지어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려움도 많았고...” 교육청 장학사로 체전 실무를 담당했던 고시홍 제주도체육회고문은 당시를 회상했다.
서슬 퍼런 군부독제시절. 도내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통령부부의 얼굴이 그려진 카드섹션을 위해 동원됐다.
1983년 6월3일 체전 상황실을 설치됐고, 개막일까지 1년여 동안 제주는 소년체전 성공을 위해 사실상 모든 행정력을 총 동원한다.
재외 동포를 비롯한 도민들의 정성어린 손길도 이어져 당시 13억9000여만원 상당의 체육기금이 조성되기도 했다. 1982년 제주개최 확정 이후 약 1년여의 공사와 체전 준비, 그야말로 온 도민이 노력 끝에 제13회 전국소년체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될 수 있었다.
당시 시설을 바탕으로 이후 1998년과 2002년 두 번의 전국체전을 치른 제주, 이제 3번째 전국체전을 앞두고 있다.
해병대소위로 월남전에 참전한 고 고문은 1969년 전역(대위)과 동시에 제주교육대학교 교련교관으로 부임하면서 제주체육과 인연을 맺는다.
이후 40여 년간 제주체육과 교육계에 몸담으면서 제주사격 부흥을 이끌었고 굵직한 체육행사의 책임(실무)자로 현장을 뛰어 다녔다.
오라벌에 경기장이 들어 설 때도 김기완(당시 교대) 전국체전 첫 사격 은메달을 수확할 때도, 부순희가 제주선수 최초로 세계대회 금메달을 딸 때도 그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체육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제주사격 40년사’, ‘제주체육50년사’ 편찬 작업에 참여한 고 고문은 지금 체육회 고문으로 후배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40여년 제주체육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며 오직 제주체육의 미래만을 생각해 온 고 고문은 제주체육의 살아있는 역사다. 그런 그가 내년 전국체전을 앞두고 있는 제주체육계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제주도체육회는 지난 1998년 첫 번째 전국체전(제79회) 제주유치를 계기로 제주체육 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다.
제주도체육회는 당시 기획단을 구성, ‘제주체육진흥7개년계획’을 수립했다. 더불어 체육기금 마련을 위한 조례제정도 추진됐다. 제주체육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그야말로 야심찬 계획이었다.
고 고문은 “계획은 좋았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3명의 제주도체육회장이 오가면서 그 계획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며 “한번 세운 계획은 정권에 상관없이 진행 돼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결국 30년 묵은 경기장에서 전국체전을 치러야 하는 사태가 빚어지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체육회 수장이 바뀐 이후 늘어나는 낙하산 인사에 대한 문제도 지적했다.
고 고문은 “나 역시 체육회 고문직을 맡고 있다. 하지만 과거 많아야 7~8명 선이던 체육회 고문이 현 체육회장 취임 이후 20여명으로 늘었다”면서 “감투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걸로 일하는 건 아니다. 적당한 인원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지만 ‘△△는 ○○라인’이라는 식의 문화는 빨리 벗어던져야 한다”고 체육회를 위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고 고문은 “후보들이 (표에 대한)유혹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와 체육은 분리돼야 한다”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그런 부분에 대해 (체육회가)조심스런 조직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제주체육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 고문은 “미래를 봐야 한다. 지금이라도 당시 계획이 유효하다면 현실에 맞게 보완해 실용화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과거 제주는 전국체전에서 동메달 1개도 귀해 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메달을 몇 개 더 따는 것 보다 우리가 할 일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엘리트 체육은 시설과 지도자, 그리고 재정이 하나 돼 선수에게 투입될 때 성공을 거줄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온 도민의 열정으로 치러낸 제13회 전국소년체전 이후 30년이 지났다. 당시 축제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오라벌은 지금 각종 중장비 소리로 들썩이고 있다. 기존 시설에 대한 보수·보강공사는 진행되고 있지만 새로 짓는 경기장은 없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행정의 무지함이 빚어낸 결과다. 매번 땜질 처방만으로 행사를 치르는 제주를 향해 던지는 고 고문의 쓴 소리가 유난히 달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