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불의 맞선 '항쟁'...재정립 필요"
"4·3은 불의 맞선 '항쟁'...재정립 필요"
  • 고상현 기자
  • 승인 2017.0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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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발포사건 70주년(하)
'빨갱이' 부정적 프레임 국가 탄압 자행
사회전반 '레드콤플렉스' 진상규명 발목
"항거 원인·폭력 실체 제대로 조명해야"
▲ 3·1절 발포사건 당시의 모습을 그린 강요배 화백의 '피살'(1991)

“그동안 4·3은 ‘수난’만 조명됐을 뿐 그 원인이었던 ‘항쟁’은 없었다.”

이번 취재를 준비하면서 만난 4·3 연구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엄연히 ‘4·3 특별법’에는 1947년 3월 1일, ‘남한 단독선거 반대’ ‘친일 청산’ 등 불의에 저항했던 날을 그 시작으로 정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날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 우리 안의 ‘레드콤플렉스’

고창훈 전 4‧3연구소장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저서 등을 통해 “4‧3을 민족의 자유를 위한 항쟁”이라고 얘기했다가 감옥에만 세 번 갔다 왔다고 얘기한다. 그는 그 배경에 대해 “우리가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혁명, 항쟁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며 “당시 미군정 자료 등에 근거해 있는 그대로 4‧3을 항쟁이라고 얘기했는데도 과거 정권은 아니꼽게 봤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군정 보고서에는 3‧1절 기념집회를 ‘민족 평화 운동’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의 민간인 발포 사건 이후 도민들 상당수가 총파업에 나서자 미군정은 자신들의 ‘단독정부’ 방침을 반대하는 도민들을 의도적으로 ‘빨갱이’로 몰아 응원경찰을 동원해 탄압하는 등 강공정책을 폈다. 이후 관의 압정에 견디지 못한 도민들이 불의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당시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장군 유고 내용 일부). 4‧3을 항쟁으로 보는 배경이다.

하지만 분단 이후 오랫동안 이어진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연좌제 등 갖은 탄압으로 4‧3에 대해서 말할 수조차 없었던 것처럼 4‧3을 항쟁이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고 전 소장은 “3‧1절 발포사건에서 시작돼 현재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는 ‘레드콤플렉스’가 4‧3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4‧3희생자유족회 관계자도 “유족 중에는 아직도 4‧3을 항쟁으로 봐야한다는 의견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 이제는 말해야 한다

4‧3이 불의에 맞선 항쟁이라고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사과한 4‧3을 두고도 극우단체에서 ‘흔들기’를 해오고 있다. 최근까지도 보수단체들이 정부에 “일부 희생자들이 폭도”라며 재심사하라고 요구하거나 극우인사가 4‧3평화공원을 “폭도공원”이라고 하는 등 유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펴낸 <6‧25전쟁> 청소년용 만화책에 배경 설명 없이 “4‧3사건은 남로당 무장 반란”이라고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3‧1절 발포사건’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규배 전 4‧3연구소장은 “3월 1일 당시 민족 독립 등을 요구하고, 이후 불의에 항거한 것이 어떻게 이념 문제와 관련 되냐”며 “그동안 4‧3 사업이 평화공원 조성 등 기념사업에 치중됐지만, 지금부터라도 도민들의 항쟁 이유, 폭력의 실체 등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해 4‧3을 항쟁의 역사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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