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사라진 자리 그래도 남은건 삶
명성 사라진 자리 그래도 남은건 삶
  • 고상현 기자
  • 승인 2016.0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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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최초 호텔 당시 이승만 대통령 숙소
이젠 일용직 노동자들 애환 달래주는 공간
▲ 1950년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주에 올 때마다 묵었던 동양여관. 당시 제주 최초의 호텔로 명성이 자자하면서 제주의 화려함을 대변해줬지만, 현재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곳으로 변화했다.

최근 원도심이 변화하고 있다. 침체된 제주시 원도심을 살리기 위해 탐라문화광장 조성 등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 모습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이에 원도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숨 쉬는 공간의 이야기를 찾아 담는다. [편집자 주]

 

쓸쓸한 밤거리에 비가 내린다. 부슬부슬 소리 없이 비가 내린다….”

1일 오후 4시께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동양여관. 어두운 여관 골마루 사이로 객실 어디선가 1960년대 인기 가요였던 ‘심야의 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복도 나무 벽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액자들이 호실 사이마다 걸렸다. 한 액자 사진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모 고급의류 상표의 모델이 한껏 자세를 취했다.

동양여관은 제주도 최초의 호텔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주에 올 때마다 이곳에 묵었을 정도로 고급호텔이었다. 하지만 현재 과거의 화려함은 옛 액자에만 남아있었다. 15년 전부터 이곳을 운영하는 조모(74‧여)씨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무 낡아서 여기가 대통령이 묵었던 곳이라고 못 느꼈어. 동네 사람이 말해주니깐 알았지”라고 했다.

과거 동양여관 일대는 고급요정, 상가들이 밀집했던 제주도 최고 번화가였다. 동양여관 바로 옆에 있었던 탐라여관은 1970년대에 박노식, 신영균 등 당대의 영화 스타들이 제주에 올 때면 머물기도 했다. 그랬던 탐라여관은 현재 간판이 내려진 채 건물만 처량하게 서 있다. 동양여관만이 그 옆을 지키고 있다.

■ ‘전 객실 월 5만 원 인상됩니다.’

이날은 여관 복도마다 주인 조씨가 써놓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조씨는 “요즘 물가가 너무 올라서 이렇게 받지 않으면 유지를 못 해”라고 말하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현재 동양여관에는 총 15개의 객실이 있다.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지금은 한 달에 특실은 25만원, 일반 방은 20만원 받아. 여관이 낡아서 관광객은 오지도 않아. 우리 호텔 주손님은 외국이나 육지에서 온 노동자야. 이번에 객실료 올리면 계속 살려나 몰라.”

오후 6시를 넘어서자 하루 노동을 마친 투숙객들이 신발과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여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5호실에 사는 문모(55)씨도 공공근로로 동네 쓰레기통을 청소하고 여관에 들어왔다. 그는 20년 전 고향인 전라도에서 제주도로 왔다고 했다.

“이곳에 와서 공사판을 전전했지. 몇 년 전에 다리를 다치면서부터는 동사무소에서 마련해준 일만 하는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문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4㎡ 남짓한 공용화장실에 몸을 씻으러 갔다.

■ “대통령이 잤다고 해도 이젠 별 거 없어.”

현재 이승만 전 대통령이 묵었던 103호실에는 한모(73)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사느라 바쁜데 대통령이 살았던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른 방보다는 커서 그 점은 좋아.” 방에는 한씨의 가재도구와 옷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물건들 넘어 보이는 다색의 참나무 벽만이 과거의 영광을 나타낼 뿐이었다.

한씨는 오전에는 부둣가에서 잡일을 하고 오후에는 폐지를 줍는다. “새벽 5시에 나가서 어둑해지면 호텔에 들어와. 그러고는 밥 먹고 텔레비전 보다가 잠들지.” 온몸이 까맣게 탄 그는 2002년부터 제주도에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원래는 목포에서 어선을 탔었는데 망했어. 그 이후로 처자식과 떨어지고…, 많이 보고 싶지…….”

오후 9시가 되자 여관 복도의 불이 모두 꺼졌다. 캄캄한 복도에는 방에서 나오는 불빛과 텔레비전 소리만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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